길벗님이 일진회 관련 글은 출처를 남기지 않으셨는데 여기서 인용했네요. 기록을 위해 여기 남깁니다.



트집조차 잡고 싶지 않은데 길벗님은 이렇게 마치 자신이 언급한 것처럼 썼네요.

서울대 최정운 교수의 <한국인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일진회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옮겨볼테니



어케 된건가요..... <한국인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언급한 부분을 옮겨본다...라는 것은 길벗님이 직접 그 책을 보고 요약 옮겼다는 의미 아닌가요?


표절에 대하여 열변을 토하던 길벗님이 그러시면 안되죠. 남의 블로그 글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읽고 옮기는 척하는거 그러면 안되죠. 안그런가요? 그러면서 뭐라? 역사를 보는 지평도 넓혀보라? 에라이~ 콱 그냥. ^^


그리고 '침소봉대 팩트주의'...... 님은 '일진회 합방성명서'는 읽어보셨나요? 아니 그런 성명서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계시는가요?


뭐, 상대조차 하기 싫은 양반이지만 해도해도 너무하는거 같아 톡 건드려보고 갑니다.


길벗님 글 중 발췌한 것(파란색)과 블로그 글 중 발췌한 것(빨간색)


똑같지만 특히 이 부분이 인상적이라는거. 어케 두 글이 똑같은지...

그러나 그가 착각한 부분은... (중략)

 

필자의 판단에 구한말에 우리에게 닥친 홉스적 자연상태는 쉽게 해소되지 않았고 적어도 70년 후인 1970년대까지 해소되지 않았다. 실로 깊고 고통스러운 ,오래 가는 상처였다.]




저는 안중근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했고, 일본의 대동아공영에 동조했다는 사실, 동학농민군이 일진회에 가담했다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대를 단순하게 이해하지 말자는 것이죠. 역사를 단편적이고 단선적으로 바라 볼 때는 그 속에 들어있는 진정한 역사를 보지 못하고 당대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진회에 관련한 서울대 최정운 교수의 <한국인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일진회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옮겨볼테니 우리가 배운 일진회에 대한 내용과 비교해 보시고 역사를 보는 지평도 넓혀 보시기 바랍니다.

 "저 백성들이 스스로 달갑게 외국 사람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은 본디 미련하고 완고해서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그 근원을 따져보면 관리들이 탐욕을 부리고 포악하게 굴어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본성을 잃고 이 지경에 이르게 만든 것입니다."

일진회의 정체에 특별한 비밀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우매했던 우리 민족의 일부였다. 백성들이 견디기 어려운 관리들의 착취는 이미 오래된 일이었지만 사회 자체가 분해된 자연상태의 고통은 더욱 입체적이었으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각별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초기에 대부분의 언론은 일진회에 대해 혼란에 휩싸인 상황이었다. 일진회의 공식적 목적은 대한제국 황실에 충성한다는 것이었지만, 일본 군대가 그들의 모임을 조선 군대의 탄압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있었다. 그들의 일관되지 않은 행동은 사실 처음부터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를 의도적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공식적인 주 활동은 독립협회의 후신으로서 연설회, 대중집회를 통한 대한제국의 개혁 운동이었고 이는 당시 현실에서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 현실에서 이런 운동이 나타났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였다. '제국신문'은 1904년 9월 30일 일진회 창설에 대해 논설을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중략)

처음부터 이용구, 송병준 등이 이끄는 일진회는 그들 내부에서 이해하기로 반역 집단이라는 점이 명백했을 것이다. 1906년 천도교를 창건한 손병희가 이용구를 비롯한 60여 명을 출교시켰을 때 공식적인 명분은 그들은 조선에 복수를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핵심부는 복수를 원하는 동학 잔당이었고, 목표는 일본의 정복을 초청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목표 아래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며 독립협회가 개발한 연설회, 시위 운동과 여러 구경거리 등을 통해 대중을 동원하는 전략을 구했던 것이다.

(중략)

당시에 독립협회의 뒤를 이어 개혁 운동을 다시 벌인다는 이들의 공식적인 명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시도한 것은 독립협회의 운동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독창적인 조세저항 운동을 벌였고 이는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저자 주 : 문유미는 일진회의 조세저항 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하였다. (Moon 2005). 그들은 처음부터 일본군의 보호를 받은 이상 대한제국의 자의적인 폭압에서 자유로웠고 그만큼 더 큰 것을 처음부터 원했던 것이다.

당시 '이 지옥 같은 나라'라는 표현이 누구나 수긍하는 말이었다면, 그 나라를 멸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명분에 타당한 일이었다.

(중략)

우찌다 료헤이를 비롯한 일본의 흑룡회 간부들이 일진회의 취지를 들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조선 내에서 일본을 도와줄 세력을 기대하긴 했지만 막상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치겠다는 말을 듣고서 말 그대로 믿을 수가 없어 여러 차례 확인 절차를 반복해야 했다(저자 주 : 문유미는 일진회의 포퓰리스트적 성격을 강조한다(Moon 2005). 나아가서 일진회를 이끌던 지식인 계층은 대부분 겸인 계층 즉 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급 관리로의 진출이 막혀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를 테면 쁘띠 부르주아 계층이 상당수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김종준 2005).

(중략)

1904년 가을부터 부각된 일진회 운동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집단적 정체성의 문제를 생각하도록 강하게 자극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모든 언동과 활동은 '한국'과 '일본'의 다름을 드러냈고 그들의 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였다. 사람들이 불쾌하게 느낀 이유는 바로 그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는 양심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 역사적, 문화적 정체 즉 '조선 사람'이라는 낙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략)

그리고 이렇게 구석에 몰린 일진회는 1910년 9월 병합 후 한 달 만에 총독부가 해산 명령을 내리자 흔적도 없이 피 한 방울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역사의 기억에서 지워져 버렸다. 민족과 일제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이용구는 곧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일진회 회원들은 이성과 이해로 판단하였다. 그들에게 국가의 문제는 이성적 판단의 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간 우리의 의식,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 아래 침잠해 있던 '의(義)'가 어느 순간 일깨워지자 그것은 순식간에 이성의 판단을 뒤엎었고 그 결정은 돌이킬 수 없었다. 우리 정체의 '의'는 나라가 망했어도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서 살아있었다. 현대 우리의 정체의 틀, '한민족'임은 구한말 우리가 처했던 고난의 자연상태에서 우리의 '조선 사람'임을 '부정 negation'했던 홉스적 사회계약을 다시 '부정'하는 이중 부정의 고통스런 변증법을 겪고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리고 우리의 민족주의 역사에서 3.1 운동이 위대한 역사인 것은 3.1 운동을 계기로 수많은 사람들이 용서받고 우리 민족으로 재결합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략)

'홉스적 자연상태'라고 제시한 구한말의 마지막 십 년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최악의 시대였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던 우리 조상들 -필자로 따지면 할아버지 세대-의 고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가난과 배고픔 뿐만 아니라 쓰라린 가슴의 상처를 수없이 입으며, 번민하고, 가책하고, 원망하고, 후회하던, 그러고도 자신이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도 확신할 수 없었던 그런 삶이었을 것이다. 살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해가 되는 줄 알면서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1909년 12월 초 이용구는 전에 은밀히 기초했던 '한일합방서'를 일진회 회원들 앞에서 공개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국민 이천만 명의 눈앞에 위급한 상황은 과연 어떠합니까? 살려고 해도 살 수 없으며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습니다. 노예처럼 희생(제물로 쓰이는 짐슴)처럼 비참한 지경에 빠져버린 오늘에 처하여 장래를 생각한다면 어찌 앞길이 막막하며 아침햇살이 희미해지는... (중략)"

지금도 이 글을 읽으면 콧날이 시큰해 옴을 느낀다. 이렇게 말하고는 대한제국을 빨리 끝내고 -일제에 넘기지 않고 새 나라를 세웠더라면 우리가 이 역사를 대하는 마음은 한결 가벼웠을 것이다. 한일병합 한 달 후 조선 총독이 일진회의 해산을 명하자 일진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중략)

조선 땅이 사람이 살 만한 곳이었다면 김두수(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악질 친일파)도 이용구도 송병준도 그렇게 비참한 존재로 추락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더 많은 애국자가 나왔을 것이다. 이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시대에 그토록 많던 친일파를 용서까지는 못해 주어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어차피 우리 민족의 아종인 것이다.

(중략)

일진회는 우리 역사에서 그간 아무도 말해서는 안 되는 '금단'의 주제였다. 우리 역사의 가장 수치스런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일진회에 대한 연구는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미국인 그레고리 헨더슨에 의해 1968년에야 '소용돌이의 한국정치(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되었다. 이 저작은 우리 학계에서 높이 평가되었지만 전혀 대학에서 진지하게 연구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주장을 당시 우리 학계가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00년에야 우리 말로 번역되었다. 1970년대에는 일진회는 당시에 일본의 공작과 지원에 의해서 만들어졌던 괴뢰 단체로 제시되었고 이 주장이 정론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 역사가 아니라 일본의 역사라는 식이었다. 그러고는 2005년 문유미가 미국의 하버드대학교에 일진회 연구로 박사 논문을 제출할 때까지 일진회에 대해서는 아무도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리고 2010년에야 김종준이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을 발전시켜 저서를 출판하였다.

헨더슨의 문제는 자신이 한국에서 근무하던 당시의 한국 정치의 특징을 소용돌이가 일시에 형성되어 몰아치는 것과 같다고 파악하고 한국 정치를 그러한 역사적 틀에서 연구했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나타났던 무시무시한 정치의 소용돌이의 전형적인 한 예는 구한말 최대의 정치 운동이었던 일진회 운동이었으며 이는 우리가 생각해 온 것보다 훨씬 대규모의 운동이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 시대 역사를 들어야본 사람이라면 일진회라는 엄청난 존재를 도저히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헨더슨에 따르면 그러한 대규모 운동, 소용돌이와 같은 한국의 정치는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동질성이 강하지만 응집성이 없는 고도로 개인화된 '원자화된 사회', 그리고 매개 집단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 패턴은 구한말 뿐만 아니라 조선 초에서부터 일제 시대를 지나 해방 이후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착각한 부분은... (중략)

필자의 판단에 구한말에 우리에게 닥친 홉스적 자연상태는 쉽게 해소되지 않았고 적어도 70년 후인 1970년대까지 해소되지 않았다. 실로 깊고 고통스러운 ,오래 가는 상처였다.]

출처(ref.) : 정치/사회 게시판 - 단선적 역사인식의 위험 - http://theacro.com/zbxe/free/1179112
by 길벗




"저 백성들이 스스로 달갑게 외국 사람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은 본디 미련하고 완고해서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그 근원을 따져보면 관리들이 탐욕을 부리고 포악하게 굴어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본성을 잃고 이 지경에 이르게 만든 것입니다."

 

일진회의 정체에 특별한 비밀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우매했던 우리 민족의 일부였다. 백성들이 견디기 어려운 관리들의 착취는 이미 오래된 일이었지만 사회 자체가 분해된 자연상태의 고통은 더욱 입체적이었으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각별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초기에 대부분의 언론은 일진회에 대해 혼란에 휩싸인 상황이었다. 일진회의 공식적 목적은 대한제국 황실에 충성한다는 것이었지만, 일본 군대가 그들의 모임을 조선 군대의 탄압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있었다. 그들의 일관되지 않은 행동은 사실 처음부터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를 의도적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공식적인 주 활동은 독립협회의 후신으로서 연설회, 대중집회를 통한 대한제국의 개혁 운동이었고 이는 당시 현실에서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 현실에서 이런 운동이 나타났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였다. '제국신문'은 1904년 9월 30일 일진회 창설에 대해 논설을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중략)

 

처음부터 이용구, 송병준 등이 이끄는 일진회는 그들 내부에서 이해하기로 반역 집단이라는 점이 명백했을 것이다. 1906년 천도교를 창건한 손병희가 이용구를 비롯한 60여 명을 출교시켰을 때 공식적인 명분은 그들은 조선에 복수를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핵심부는 복수를 원하는 동학 잔당이었고, 목표는 일본의 정복을 초청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목표 아래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며 독립협회가 개발한 연설회, 시위 운동과 여러 구경거리 등을 통해 대중을 동원하는 전략을 구했던 것이다.

 

(중략)

 

당시에 독립협회의 뒤를 이어 개혁 운동을 다시 벌인다는 이들의 공식적인 명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시도한 것은 독립협회의 운동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독창적인 조세저항 운동을 벌였고 이는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저자 주 : 문유미는 일진회의 조세저항 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하였다. (Moon 2005). 그들은 처음부터 일본군의 보호를 받은 이상 대한제국의 자의적인 폭압에서 자유로웠고 그만큼 더 큰 것을 처음부터 원했던 것이다.

 

당시 '이 지옥 같은 나라'라는 표현이 누구나 수긍하는 말이었다면, 그 나라를 멸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명분에 타당한 일이었다.

 

(중략)

 

우찌다 료헤이를 비롯한 일본의 흑룡회 간부들이 일진회의 취지를 들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조선 내에서 일본을 도와줄 세력을 기대하긴 했지만 막상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치겠다는 말을 듣고서 말 그대로 믿을 수가 없어 여러 차례 확인 절차를 반복해야 했다(저자 주 : 문유미는 일진회의 포퓰리스트적 성격을 강조한다(Moon 2005). 나아가서 일진회를 이끌던 지식인 계층은 대부분 겸인 계층 즉 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급 관리로의 진출이 막혀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를 테면 쁘띠 부르주아 계층이 상당수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김종준 2005).

 

(중략)

 

1904년 가을부터 부각된 일진회 운동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집단적 정체성의 문제를 생각하도록 강하게 자극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모든 언동과 활동은 '한국'과 '일본'의 다름을 드러냈고 그들의 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였다. 사람들이 불쾌하게 느낀 이유는 바로 그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는 양심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 역사적, 문화적 정체 즉 '조선 사람'이라는 낙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략)

 

그리고 이렇게 구석에 몰린 일진회는 1910년 9월 병합 후 한 달 만에 총독부가 해산 명령을 내리자 흔적도 없이 피 한 방울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역사의 기억에서 지워져 버렸다. 민족과 일제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이용구는 곧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일진회 회원들은 이성과 이해로 판단하였다. 그들에게 국가의 문제는 이성적 판단의 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간 우리의 의식,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 아래 침잠해 있던 '의(義)'가 어느 순간 일깨워지자 그것은 순식간에 이성의 판단을 뒤엎었고 그 결정은 돌이킬 수 없었다. 우리 정체의 '의'는 나라가 망했어도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서 살아있었다. 현대 우리의 정체의 틀, '한민족'임은 구한말 우리가 처했던 고난의 자연상태에서 우리의 '조선 사람'임을 '부정 negation'했던 홉스적 사회계약을 다시 '부정'하는 이중 부정의 고통스런 변증법을 겪고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리고 우리의 민족주의 역사에서 3.1 운동이 위대한 역사인 것은 3.1 운동을 계기로 수많은 사람들이 용서받고 우리 민족으로 재결합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략)

 

'홉스적 자연상태'라고 제시한 구한말의 마지막 십 년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최악의 시대였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던 우리 조상들 -필자로 따지면 할아버지 세대-의 고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가난과 배고픔 뿐만 아니라 쓰라린 가슴의 상처를 수없이 입으며, 번민하고, 가책하고, 원망하고, 후회하던, 그러고도 자신이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도 확신할 수 없었던 그런 삶이었을 것이다. 살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해가 되는 줄 알면서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1909년 12월 초 이용구는 전에 은밀히 기초했던 '한일합방서'를 일진회 회원들 앞에서 공개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국민 이천만 명의 눈앞에 위급한 상황은 과연 어떠합니까? 살려고 해도 살 수 없으며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습니다. 노예처럼 희생(제물로 쓰이는 짐슴)처럼 비참한 지경에 빠져버린 오늘에 처하여 장래를 생각한다면 어찌 앞길이 막막하며 아침햇살이 희미해지는... (중략)"

 

지금도 이 글을 읽으면 콧날이 시큰해 옴을 느낀다. 이렇게 말하고는 대한제국을 빨리 끝내고 -일제에 넘기지 않고 새 나라를 세웠더라면 우리가 이 역사를 대하는 마음은 한결 가벼웠을 것이다. 한일병합 한 달 후 조선 총독이 일진회의 해산을 명하자 일진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중략)

 

조선 땅이 사람이 살 만한 곳이었다면 김두수(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악질 친일파)도 이용구도 송병준도 그렇게 비참한 존재로 추락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더 많은 애국자가 나왔을 것이다. 이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시대에 그토록 많던 친일파를 용서까지는 못해 주어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어차피 우리 민족의 아종인 것이다.

 

(중략)


일진회는 우리 역사에서 그간 아무도 말해서는 안 되는 '금단'의 주제였다. 우리 역사의 가장 수치스런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일진회에 대한 연구는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미국인 그레고리 헨더슨에 의해 1968년에야 '소용돌이의 한국정치(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되었다. 이 저작은 우리 학계에서 높이 평가되었지만 전혀 대학에서 진지하게 연구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주장을 당시 우리 학계가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00년에야 우리 말로 번역되었다. 1970년대에는 일진회는 당시에 일본의 공작과 지원에 의해서 만들어졌던 괴뢰 단체로 제시되었고 이 주장이 정론으로 자리잡았다. 우리 역사가 아니라 일본의 역사라는 식이었다. 그러고는 2005년 문유미가 미국의 하버드대학교에 일진회 연구로 박사 논문을 제출할 때까지 일진회에 대해서는 아무도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리고 2010년에야 김종준이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을 발전시켜 저서를 출판하였다.

 

헨더슨의 문제는 자신이 한국에서 근무하던 당시의 한국 정치의 특징을 소용돌이가 일시에 형성되어 몰아치는 것과 같다고 파악하고 한국 정치를 그러한 역사적 틀에서 연구했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나타났던 무시무시한 정치의 소용돌이의 전형적인 한 예는 구한말 최대의 정치 운동이었던 일진회 운동이었으며 이는 우리가 생가해 온 것보다 훨씬 대규모의 운동이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 시대 역사를 들어야본 사람이라면 일진회라는 엄청난 존재를 도저히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헨더슨에 따르면 그러한 대규모 운동, 소용돌이와 같은 한국의 정치는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동질성이 강하지만 응집성이 없는 고도로 개인화된 '원자화된 사회', 그리고 매개 집단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 패턴은 구한말 뿐만 아니라 조선 초에서부터 일제 시대를 지나 해방 이후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착각한 부분은... (중략)

 

필자의 판단에 구한말에 우리에게 닥친 홉스적 자연상태는 쉽게 해소되지 않았고 적어도 70년 후인 1970년대까지 해소되지 않았다. 실로 깊고 고통스러운 ,오래 가는 상처였다.]

 

 

이상 해당 책의 일진회 관련 부분을 소개하였다. 최정운 교수의 견해에 깊이 공감하는 바이다.

백이숙제는 "以暴易暴"를 남겼고 한그루는 "以"를 남기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