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사 역사교과서가 친일 독재 미화를 했는가?

부제 : 단선적 역사인식의 위험


                                                                       


교학사의 역사교과서 채택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면서 진보/보수 양측이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논쟁이 구체적 내용을 가지고 공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딱지 붙이기로 비방하고 있어 비생산적으로 흐르고 있네요.

제가 교학사의 역사교과서(수정 전)를 링크하니 여러분들이 보시고 무엇이 문제인지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공방중인 부분은 근현대사 부분이라 제가 교학사 교과서 근현대사 부문만 훑어보았습니다만 별다른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P223의 대한전도에서 <우산도>를 <독도>라고 한 부분은 억지로 보이고, P328의 박정희의 혁명공약 중에서 여섯번째인 <민간 이양 약속> 부분을 누락한 것은 그 의도성이 보여 잘못이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지적하면 조선인들에 의해 조선 내 중국인의 학살이 이루어진 <만보산 사건>을 다루지 않은 것도 우리의 치부를 숨기고 반성하지 않은 잘못이라 볼 수 있구요.  이 이외에는 역사관의 차이에 따른 문제이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왜곡은 없어 보입니다. 물론 연도나 인물의 오기, 오탈자는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런 것은 수정만 하면 될 일이지 쟁점이 될 사안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읽어 보시고 자칭 진보진영에서 진영논리에 따라 이런 난리를 치는지, 아니면 보수진영(권희영 교수)에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서 교과서를 집필했는지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nabuco.org/news/article.html?no=6891

* 지금은 유보 상태로 읽어 볼 수 없게 되어 있네요.


1.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친일적으로 서술되고 독재를 미화했는가?

교학사 교과서를 친일 교과서라고 자칭 진보진영이 비난하던데, 도대체 교학사 교과서에 친일적이라고 볼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자칭 진보진영이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친일적>이라고 하도 떠들어대서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지만, 그런 내용이나 구절을 찾지 못했습니다. 어떤 내용이 친일적으로 보이는지 여러분들이 좀 밝혀 주십시오.

제가 링크한 교학사 역사교과서는 수정전의 교과서로 발행되는 교과서는 자칭 진보진영이 문제 삼았던 부분을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수정해서 출판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수정 전의 교과서에도 문제를 삼을만 한 것이 없어 보이는데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자칭 진보진영이 친일적이라고 이야기하는 몇 가지를 짚어보고 이 비판이 정당한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현지 위안부와는 달리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군 트럭에 실려 일본군을 따라다녔다>

이 서술이 친일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교학사 교과서가 이 부분에 대해 서술한 것을 보면 저 표현은 현지 위안부들보다 조선인 위안부들이 더 힘들고 처참한 생활을 한 것이라는 이야기이지, 자칭 좌파들이 교학사 교과서에는 없는 <자발적>이라는 문구를 넣어 마치 조선인 위안부들이 자발적으로 일본군을 따라 다니면서 봉사하거나 장사를 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저 표현이 있는 페이지의 사진과 전체적인 문맥을 보면 조선인 위안부들이 더 고생했다는 의미로 읽히지, <자발적으로 따라 다녔다>고 해석하는 것은 명백한 의도적인 오독이지요. 저렇게 해석하는 자칭 좌파들의 뇌 회로가 궁금할 따름입니다.

자칭 좌파들이 하도 난리를 쳐 대니까 이번에 인쇄되어 나오는 교학사 교과서는 이 부분을 수정해서 다른 표현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새겨들을 좋은 자료가 있습니다. 아래에 링크하는 정규재의 말을 경청해 보세요. 역사를 보는 시각이 어떠해야 할지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N3GI72c1N-0&feature=c4-overview&list=UUOqCunaF9qVN8bXwsK0HT3g

임지현 교수(한양대)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책도 일독을 권합니다.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저는 임지현 교수의 생각과 궤를 같이 합니다. 사실 서구에서는 민족주의를 나찌의 파시즘과 유사하게 보아 부정적 이미지가 강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善(선)과 정의의 대체어처럼 인식되고 사회 담론에서도 만병통치약처럼 사용되는 경향이 있(었)지요. 민족주의는 피식민지 시대나 국가 건설 단계에서 국민(민족)의 결집과 추동력을 끌어내기 위해 필요할 수는 있겠으나, 성숙한 사회에서는 오히려 국수적이고 인종차별적으로 흘러 그 부작용이 많아 경계해야 할 것이죠. 북한 정권과 남한의 일부 꼴통 좌파들이 툭 하면 민족주의를 내세워 대중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만, 이젠 이것이 먹힐 리가 없고 먹혀서도 안되겠지요.  


2) 김성수의 친일 논란

자칭 진보진영이 교학사 교과서가 <김성수>의 친일행적을 미화, 축소했다고 비판하는 내용을 아래에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292쪽 이야기 한국사: 김성수의 광복진전 동향」 대폭수정

☞“경영자로서의 삶을 살았다.…경영자로 활동하면서” 운운 하는 서술이 나오는데 일제 강점기에 잘 쓰이지도 않던 경영자라는 말을 굳이 교과서에 쓸 필요가 있을까?

☞“1920년에는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동아일보를 설립한 것이 아니라 동아일보사를 설립하였다로 써야 함.

☞“1943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는 김성수 명의로 일제의 징병에 찬성하는 글이 실리기도 하였다”라고 해서 김성수의 친일 글이 한 차례 실린 것처럼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러 차례 글과 담화가 실렸음. 김성수의 친일 행위를 축소 서술. 

☞“일제의 통치 정책에도 상당 부분 협력하였다. 그리하여 시국 강연을 하기도 하였고, 임전 보국단 등 전쟁 협력 단체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학병 지원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특히 1943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는 김성수 명의로 일제의 징병에 찬성하는 글이 실리기도 하였다.” 왜 한 문단에서 계속 ‘도’라는 조사를 남발하고 있는 것일까? 겉으로는 친일 행위를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꼼수? 그냥 ‘일제의 통치 정책에 협력하였다. 그리하여 시국 강연을 하였고, 임전 보국단 등 전쟁 협력 단체에 참여하였다. 또한 학병 지원을 독려하였다. 특히 1943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등 몇 차레에 일제의 징병에 찬성하는 글을 실었다”로 쓰는 것이 맞음.

☞“해방 후…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받들자고 주장하며 송진우 사후 한국 민주당을 지도하였다.” 한민당이 임정 봉대론을 주장한 것은 맞지만 거기에 앞장을 선 것은 김성수가 아니라 송진우였다. 김성수는 일제 강점 말기의 친일 행적 때문에 한민당의 전면에 나설 수 없었던 것이다. 김성수가 전면에 나선 것은 1946년 초 송진우가 암살당한 이후였다. 그리고 이 때는 이미 한민당도 임정 봉대론을 내세우지 않았다. 따라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받들자고 주장하며 송진우 사후 한국 민주당을 지도하였다’라는 서술은 오류.

☞김성수의 해방 이후 행적을 길게 쓴 데는 의도가 있음. 끝내 친일파 김성수 구하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 새로운 공과론. 최남선 관련 서술과 같이 검토할 필요.


그런데 교학사가 서술한 김성수의 행적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은 것이 있나요? 사실과 다른 것을 서술했다면 그 구체적인 내용을 지적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은 교학사가 <김성수>의 행적에 대해 기술한 부분이 사실을 왜곡했다고 생각되는지, 아니면 자칭 진보진영의 터무니없는 트집잡기라고 생각되십니까?


3) 북한은 일제 청산을 했는데 우리는 친일인사가 설쳤다고?

자칭 진보진영은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서 친일인사를 중용한 반면, 북한은 친일 청산을 했다고 비교하면서 이승만과 대한민국 건국을 비하하지요. 아래에 남한과 북한의 초대 내각 인물들의 면면을 올려 놓을테니 자칭 진보진영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세요. 저는 북한이나 남한이 일제하에서 고위직을 지냈거나 왕성한 활동을 한 사람들을 등용한 것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한 국가의 독립과 건설과정에는 인력과 인재, 경험들이 필요합니다. 자기 보신과 영달을 위해 적극적으로 친일을 한 사람들 이외에는 배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요.


 ▲대한민국 초대 내각

  

   *대통령-이승만(李承晩,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부통령-이시영(李始榮, 임정내무총장)

   *국무총리*국방장관-이범석(李範奭, 광복군 참모장)

   *국회의장-신익희(申翼熙, 임정내무총장)

   *대법원장-김병로(金炳魯, 항일변호사)

   *무임소장관-이윤영(李允榮, 국내항일)

   *무임소 장관-이청천(李靑天*광복군 총사령관)

   *외무장관-장택상(張澤相, 청구구락부사건)

   *내무장관-윤치영(尹致映, 홍업구락부사건)

   *법무장관-이 인(李 仁, 항일변호사, 한글학회사건)

   *재무장관-김도연(金度演, 2.8독립사건)

   *상공장관-임영신(任永信, 독립운동가-교육가)

   *문교장관-안호상(安浩相, 항일교육)

   *사회장관-전진한(錢鎭漢, 국내항일)

   *체신장관-윤석구(尹錫龜, 국내항일, 6.25전쟁 중 인민군에게 총살)

   *교통장관-민희식(閔熙植, 재미항일)

   *총무처장-김병연(국내항일)

   *기획처장-이순탁(국내항일)

   *공보처장-김동성(국내항일)

  

   ▲북한 김일성 내각

  

   *김영주-북한 부주석, 당시 서열 2위, 김일성 동생 (일제시대 헌병 보조원)

   *장헌근-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사법부장, 당시 서열 10위 (일제시대 중추원 참의)

   *강양욱-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당시 서열 11위 (일제시대 도의원)

   *정국은-북한 문화선전성 부부상 (아사히 서울지국 기자)

   *김정제-북한 보위성 부상 (일제시대 양주군수)

   *조일명-북한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학도병 지원유세 주도)

   *홍명희-북한 부수상 (일제시대 임전대책협의회 가입 활동)

   *이 활-북한군 초대공군 사령관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허민국-북한 인민군 9사단장 (일제시대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강치우-북한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일제시대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김달삼-조선로동당 4.3사건 주동자 (일제시대 소위)

   *박팔양-북한 노동신문 창간발기인, 노동신문 편집부장 (일제시대 만선일보 편집부장)

   *한낙규-북한 김일성대 교수 (일제시대 검찰총장)

   *정준택-북한 행정10국 산업국장 (일제시대 광산지배인 출신, 일본군 복무)

   *한희진-북한 임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 (일제시대 함흥철도 국장)

   *이승엽-남조선 로동당 서열 2위, 월북 후 빨치산 유격투쟁 지도 (일제시대 식량수탈기관인 ‘식량영단’ 이사)

* 위 자료가 왜곡되었다는 반론도 링크합니다.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65108

이 반론을 모두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북한은 친일을 청산했고, 남한은 그렇지 못했다는 자칭 진보진영의 주장은 힘을 잃게 됩니다. 반론을 쓴 사람의 논리라면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를 친일 명단에 넣은 것은 잘못이며, 자칭 진보진영이 교학사 역사교과서의 <김성수>에 대한 서술을 비판한 것도 일관성이 없는 터무니 없는 트집잡기에 불과한 것이죠.

4) 자칭 진보진영이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비판한 내용

아래에 자칭 진보진영이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비판한 내용을 링크합니다. 시간이 나시면 한번 읽어 보시죠. 저런 식으로 트집 잡으면 소위 자칭 진보진영이 저술한 다른 역사교과서들을 보수진영에서 비판하게 되면 책 한 권 분량의 비판서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저는 교학사 교과서가 완벽하게 객관적이고 형평성을 갖춘 역사교과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 정도면 저의 학생시절 교과서보다 훨씬 잘 된 교과서라고 생각되고, 현재 학교에서 채택하여 사용하는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교학사 역사교과서의 저 정도의 서술이 편향되고 왜곡된 것이라서 채택되어서 곤란하다고 주장한다면, 다른 8종의 역사교과서도 같은 이유로 채택되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http://www.minjok.or.kr/images/2013/notice/report.zip



2. 교학사 역사교과서 채택을 방해하는 행위는 정당한가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채택한 디지텍고가 폭파 위협까지 받고 있다고 하네요.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4011001030227158004

국정 교과서에서 검인정 교과서로 바뀐 이유와 취지를 폭파 협박하는 사람들이나 단체들은 알기나 할까요?

이런 (폭파 위협) 행위들은 국정 교과서로 되돌리겠다는 현 정권에게 명분만 줄 뿐이라는 사실을 이들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집필하는 것을 권장하는 취지에서 검인정 교과서로 전환이 이루어진 것일텐데....

교과서를 국정에서 검인정으로 바꾼 것은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고 그런 시각들을 상호 존중해서 학생들이 다각도로 역사를 살펴보고 시야를 넓힘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런 취지에서 이번 교학사 교과서는 객관적 사실을 왜곡한 것이 없음으로 각 학교에서 채택해 사용하는데 방해받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지금 전교조, 전공노, 시민단체, 농민단체들이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거나 하려던 학교에 전화로 폭언하거나 현장에서시위를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행위말로 독재정치시대의 산물이고 관제데모와 유사하며 전체주의적 사고의 발로이지요.

파쇼체제와 유신으로의 회귀가 맞긴 맞나 봅니다. 산업화 시대의 독재 정권의 사고구조와 판박이인 사람들이 역사를 퇴행시키는 것 같군요. 그것도 진보와 민주와 소통을 부르짖으면서 저런 행위를 하는 것에 아연실색해집니다. 산업화 시대의 독재는 경제발전이라는 성과라도 있었지만 지금의 자칭 진보들에 의해 자행되는 독선적, 전체주의적 사고와 행위는 어떤 생산적 성과물도 없고 단지 역사를 퇴행시킬 뿐이죠. 더욱 심각한 것은 이들이 자기들의 사고와 행위가 퇴행적이고 반민주적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3. 단선적 역사 인식의 위험

안중근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던 사람이며, 1900년 초반까지는 일본의 대동아공영 정책에 동조했고, 이또 히로부미는 일본 내의 온건파로 테라우치 등의 과격한 정한론에 맞서 조선을 자발적 근대화로 끌어가려 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죠. 또 일진회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학농민군의 잔여세력들이라는 사실과 박정희의 아버지가 동학농민군의 성주의 접주였다는 사실도 우리 국민들 중에 아는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위정척사파의 사람들이 조선말이나 대한제국의 의병의 주축이었다는 사실도 모르겠지요.

저는 안중근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했고, 일본의 대동아공영에 동조했다는 사실, 동학농민군이 일진회에 가담했다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대를 단순하게 이해하지 말자는 것이죠. 역사를 단편적이고 단선적으로 바라 볼 때는 그 속에 들어있는 진정한 역사를 보지 못하고 당대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진회에 관련한 서울대 최정운 교수의 <한국인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일진회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옮겨볼테니 우리가 배운 일진회에 대한 내용과 비교해 보시고 역사를 보는 지평도 넓혀 보시기 바랍니다.


<반역 집단 일진회>

당시 대한제국의 '홉스적 자연상태'에서 일부 사람들에 의해 해법으로 제기된 '홉스적 사회계약'의 발상은 1904년 러일 전쟁 와중에 일진회와 진보회로 구체화되었다. 당시 신문에서나 많은 지식인들은 이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일진회와 진보회란 실제로는 괴로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이웃나라 일본의 천황의 주권을 들여와서, 또는 일본의 정복을 초대하여 도탄에 빠져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 조선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이성에 근거한 사회계약적 발상의 정치적 표현이었다.

일진회와 진보회는 처음부터 반역 음모 집단이었다(저자 주: 문유미에 따르면 일진회는 대한제국의 흥망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Moon 2005;2) 그러나 필자는 처음부터 일진회의 핵심 집단은 대한제국의 멸망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일진회의 핵심적인 집단은 '동학 잔당'이었음은 알려진 일이었다(저자 주 : 일진회와 진보회는 1904년 말에 합병하였지만 여전히 독자적인 활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동학 잔당들은 이용구가 처음에 만들었던 진보회 쪽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일진회와 진보회를 구별하지 않고 일진회로 통일해서 논할 것이다.).

그들은 동료 동학도들을 수도 없이 학살했던 조선 정부에 대한 복수를 노리는 집단이었고 그들의 목표는 조선의 멸망이었다. 1904년 말부터 그들은 전국적으로 '단발회'라는 행사 등 구경거리를 만들어 시위를 하며 전국을 누볐다. 그들의 빡빡 깎은 머리와 검은 옷은 '반 조선'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이 운동을 일러 '갑진개혁운동'이라고 했다. 그들은 1905년 11월 5일에는 대한제국은 일본에 외교권을 위임해야 한다는 '선언서'를 발표하여 마각을 여지없이 드러냈다(저자 주 : 이즈음에 일진회의 윤시병, 송병준 등이 선언서를 게시하였는데 그 대의는 "우리나라는 멸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나고 있으므로 공사 간의 대소인이 모두 일본의 명을 따라야 한다."라고 하였다 한다.(황현)).

알려진 바에 따르면 회원 비표를 갖고 다니며 회비를 납부하는 정식 회원만 14만 명이 넘었고, 주변에서 일진회의 시위에 합류하고 박수치고 성원하며 쫓아다니는 사람들의 수는 1백만 명을 헤아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핵심의 동학 잔당을 제외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홉스적 사회계약에 참여하여 조선 백성을 위해 일본의 국가권력을 모셔와야 한다고 판단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1905년 의정부찬정이던 최익현은 여러 차례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고종은 허락하지 않았고 고종은 그를 불러 대화를 청했다. 그 자리에서 최익현은 당시 최대의 현안이던 일진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백성들이 스스로 달갑게 외국 사람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은 본디 미련하고 완고해서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그 근원을 따져보면 관리들이 탐욕을 부리고 포악하게 굴어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본성을 잃고 이 지경에 이르게 만든 것입니다."

일진회의 정체에 특별한 비밀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우매했던 우리 민족의 일부였다. 백성들이 견디기 어려운 관리들의 착취는 이미 오래된 일이었지만 사회 자체가 분해된 자연상태의 고통은 더욱 입체적이었으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각별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초기에 대부분의 언론은 일진회에 대해 혼란에 휩싸인 상황이었다. 일진회의 공식적 목적은 대한제국 황실에 충성한다는 것이었지만, 일본 군대가 그들의 모임을 조선 군대의 탄압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있었다. 그들의 일관되지 않은 행동은 사실 처음부터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를 의도적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공식적인 주 활동은 독립협회의 후신으로서 연설회, 대중집회를 통한 대한제국의 개혁 운동이었고 이는 당시 현실에서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 현실에서 이런 운동이 나타났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였다. '제국신문'은 1904년 9월 30일 일진회 창설에 대해 논설을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중략)

처음부터 이용구, 송병준 등이 이끄는 일진회는 그들 내부에서 이해하기로 반역 집단이라는 점이 명백했을 것이다. 1906년 천도교를 창건한 손병희가 이용구를 비롯한 60여 명을 출교시켰을 때 공식적인 명분은 그들은 조선에 복수를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핵심부는 복수를 원하는 동학 잔당이었고, 목표는 일본의 정복을 초청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목표 아래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며 독립협회가 개발한 연설회, 시위 운동과 여러 구경거리 등을 통해 대중을 동원하는 전략을 구했던 것이다.

(중략)

당시에 독립협회의 뒤를 이어 개혁 운동을 다시 벌인다는 이들의 공식적인 명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시도한 것은 독립협회의 운동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독창적인 조세저항 운동을 벌였고 이는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저자 주 : 문유미는 일진회의 조세저항 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하였다. (Moon 2005). 그들은 처음부터 일본군의 보호를 받은 이상 대한제국의 자의적인 폭압에서 자유로웠고 그만큼 더 큰 것을 처음부터 원했던 것이다.

당시 '이 지옥 같은 나라'라는 표현이 누구나 수긍하는 말이었다면, 그 나라를 멸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명분에 타당한 일이었다.

(중략)

우찌다 료헤이를 비롯한 일본의 흑룡회 간부들이 일진회의 취지를 들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조선 내에서 일본을 도와줄 세력을 기대하긴 했지만 막상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치겠다는 말을 듣고서 말 그대로 믿을 수가 없어 여러 차례 확인 절차를 반복해야 했다(저자 주 : 문유미는 일진회의 포퓰리스트적 성격을 강조한다(Moon 2005). 나아가서 일진회를 이끌던 지식인 계층은 대부분 겸인 계층 즉 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급 관리로의 진출이 막혀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를 테면 쁘띠 부르주아 계층이 상당수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김종준 2005).

(중략)

1904년 가을부터 부각된 일진회 운동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집단적 정체성의 문제를 생각하도록 강하게 자극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모든 언동과 활동은 '한국'과 '일본'의 다름을 드러냈고 그들의 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였다. 사람들이 불쾌하게 느낀 이유는 바로 그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는 양심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 역사적, 문화적 정체 즉 '조선 사람'이라는 낙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략)

그리고 이렇게 구석에 몰린 일진회는 1910년 9월 병합 후 한 달 만에 총독부가 해산 명령을 내리자 흔적도 없이 피 한 방울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역사의 기억에서 지워져 버렸다. 민족과 일제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이용구는 곧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일진회 회원들은 이성과 이해로 판단하였다. 그들에게 국가의 문제는 이성적 판단의 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간 우리의 의식,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 아래 침잠해 있던 '의(義)'가 어느 순간 일깨워지자 그것은 순식간에 이성의 판단을 뒤엎었고 그 결정은 돌이킬 수 없었다. 우리 정체의 '의'는 나라가 망했어도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서 살아있었다. 현대 우리의 정체의 틀, '한민족'임은 구한말 우리가 처했던 고난의 자연상태에서 우리의 '조선 사람'임을 '부정 negation'했던 홉스적 사회계약을 다시 '부정'하는 이중 부정의 고통스런 변증법을 겪고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리고 우리의 민족주의 역사에서 3.1 운동이 위대한 역사인 것은 3.1 운동을 계기로 수많은 사람들이 용서받고 우리 민족으로 재결합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략)

'홉스적 자연상태'라고 제시한 구한말의 마지막 십 년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최악의 시대였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던 우리 조상들 -필자로 따지면 할아버지 세대-의 고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가난과 배고픔 뿐만 아니라 쓰라린 가슴의 상처를 수없이 입으며, 번민하고, 가책하고, 원망하고, 후회하던, 그러고도 자신이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도 확신할 수 없었던 그런 삶이었을 것이다. 살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해가 되는 줄 알면서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1909년 12월 초 이용구는 전에 은밀히 기초했던 '한일합방서'를 일진회 회원들 앞에서 공개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국민 이천만 명의 눈앞에 위급한 상황은 과연 어떠합니까? 살려고 해도 살 수 없으며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습니다. 노예처럼 희생(제물로 쓰이는 짐슴)처럼 비참한 지경에 빠져버린 오늘에 처하여 장래를 생각한다면 어찌 앞길이 막막하며 아침햇살이 희미해지는... (중략)"

지금도 이 글을 읽으면 콧날이 시큰해 옴을 느낀다. 이렇게 말하고는 대한제국을 빨리 끝내고 -일제에 넘기지 않고 새 나라를 세웠더라면 우리가 이 역사를 대하는 마음은 한결 가벼웠을 것이다. 한일병합 한 달 후 조선 총독이 일진회의 해산을 명하자 일진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중략)

조선 땅이 사람이 살 만한 곳이었다면 김두수(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악질 친일파)도 이용구도 송병준도 그렇게 비참한 존재로 추락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더 많은 애국자가 나왔을 것이다. 이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시대에 그토록 많던 친일파를 용서까지는 못해 주어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어차피 우리 민족의 아종인 것이다.

(중략)

일진회는 우리 역사에서 그간 아무도 말해서는 안 되는 '금단'의 주제였다. 우리 역사의 가장 수치스런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일진회에 대한 연구는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미국인 그레고리 헨더슨에 의해 1968년에야 '소용돌이의 한국정치(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되었다. 이 저작은 우리 학계에서 높이 평가되었지만 전혀 대학에서 진지하게 연구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주장을 당시 우리 학계가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00년에야 우리 말로 번역되었다. 1970년대에는 일진회는 당시에 일본의 공작과 지원에 의해서 만들어졌던 괴뢰 단체로 제시되었고 이 주장이 정론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 역사가 아니라 일본의 역사라는 식이었다. 그러고는 2005년 문유미가 미국의 하버드대학교에 일진회 연구로 박사 논문을 제출할 때까지 일진회에 대해서는 아무도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리고 2010년에야 김종준이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을 발전시켜 저서를 출판하였다.

헨더슨의 문제는 자신이 한국에서 근무하던 당시의 한국 정치의 특징을 소용돌이가 일시에 형성되어 몰아치는 것과 같다고 파악하고 한국 정치를 그러한 역사적 틀에서 연구했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나타났던 무시무시한 정치의 소용돌이의 전형적인 한 예는 구한말 최대의 정치 운동이었던 일진회 운동이었으며 이는 우리가 생각해 온 것보다 훨씬 대규모의 운동이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 시대 역사를 들어야본 사람이라면 일진회라는 엄청난 존재를 도저히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헨더슨에 따르면 그러한 대규모 운동, 소용돌이와 같은 한국의 정치는 중앙집권적 정치구조, 동질성이 강하지만 응집성이 없는 고도로 개인화된 '원자화된 사회', 그리고 매개 집단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 패턴은 구한말 뿐만 아니라 조선 초에서부터 일제 시대를 지나 해방 이후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착각한 부분은... (중략)

필자의 판단에 구한말에 우리에게 닥친 홉스적 자연상태는 쉽게 해소되지 않았고 적어도 70년 후인 1970년대까지 해소되지 않았다. 실로 깊고 고통스러운 ,오래 가는 상처였다.]
출처 : http://blog.naver.com/athina/40195401151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의적(임꺽정,홍길동) - 동학농민군 - 의병 - 항일무장투쟁 독립군으로 역사적 계보가 이어진다고 생각하며 그 속에서 정통성을 찾으려 하지만, 역사는 단선적이고 단순하게 흘러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식의 계보적 정통성을 강조하는 세력(특히 정치세력)은 역설적으로 당대의 정통성에는 매우 취약한 세력들입니다. 현재 민주당이나 자칭 진보진영이 자기들의 과거 민주화운동 경력을 강조하고, 박정희의 독재, 새누리당의 계보와 과거사를 들먹이며 공격하면서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도 이런 천박한 역사인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당대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정체성을 가진 세력이나 집단이 정통성이 있는 것이지, 단순히 과거의 계보에서 정통성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노예 해방을 했던 링컨은 당시에 공화당 소속이었고 당시의 민주당은 이에 반대했지만, 지금은 민주당이 진보적 경향을 띠고 공화당은 보수에 서 있지요. 이러한 현상(역사적 사실)들을 단선적 사고로 이해해서는 엄청난 혼란이 오고 역사에서 제대로 배울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올바르지 못한 역사인식들이 <만보산 사건>을 숨기고, 임진왜란시에 경복궁이 일본군이 아니라 조선 민중들에 의해 불태워졌으며, 선조의 아들인 임해군(맏아들)과 순화군을 조선 민중들이 잡아다 일본군 가토에게 넘겨준 사실도 은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민비가 친인척과 조선왕조의 안위에만 급급했다는 사실, 민비의 친인척의 부패와 악행, 임오군란시에 조선군인들이 민비를 죽이려 했고, 민비가 민비를 욕했던 여인이 사는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이는 악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은폐된 채, 단지 일본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이유로 ‘조선의 국모’로 추앙되고 민비를 ‘명성황후’라고 서술하지 않았다고 교학사 교과서가 친일적이라고 비난받는 작금의 사태도 올바른 역사관이 정립되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장 좌파적이고 민중사관에 충실해야 할 자칭 진보진영이 반민중적 시각의 역사인식을 드러낼 때 제가 오히려 당혹스러울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세상은 요지경입니다.


 

PS : 교학사 751건의 수정의 진실

교학사 역사교과서 751건 수정 내용을 링크합니다.

대부분 오탈자, 어법의 수정이고 주요 수정 부분이라 해봐야 4곳 정도인데, 이것도 문제가 될 부분이 아니네요.

자칭 진보진영이 교학사가 751군데를 수정했다고 난리를 쳤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요즈음 국정원 댓글 사건도 그렇고 자칭 진보진영의 뻥튀기가 심해도 너무 심하군요.

http://blog.naver.com/pjbjp24/110183409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