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한국에서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거나 일본의 왕을 천황이라고 부르면 친일파(일본 제국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로 몰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테러리스트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었다:

 

「백범 김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http://www.skepticalleft.com/bbs/tb.php/01_main_square/41925

 

이 글에서는 “일왕으로 부를 것인가, 천황으로 부를 것인가”와 관련된 문제를 다룰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것은 내가 알 바 아니다. 나는 굳이 천황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꼭 일왕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엄밀하게 불러야 한다?
 

중국의 황제나 로마의 황제와는 달리 일본의 왕은 황제라고 불리기에는 민망하다. 황제(皇帝, emperor)는 제국(帝國, empire)의 통치자를 뜻하며, 제국은 주변의 여러 나라를 통치하는 나라를 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따지면서 엄밀하게 불러야 한다면 엄청나게 번거로울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민주주의와는 거의 상관이 없는 사실상 왕국이다. 또한 1987년 이전의 대한민국 역시 무늬만 민주주의 국가였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 또는 국민의 국가와 거리가 멀었다고 해서 대한민국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나? 대신 대한독재국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리고 북조선은 조선준왕국이라고 불러야 하나?

 

대한제국은 어떤가? 그 나라가 제국이었나? 고종 황제와 명성 황후는 어떤가? 엄밀하게 부르기 위해 명성 황후가 아니라 명성 왕비 또는 민비라고 불러야 하나?

 

나치(Nationalsozialismus, National Socialism, 민족 사회주의)는 사회주의 정당이었나? 사회주의와 거리가 아주 멀었기 때문에 나치라고 불러서는 안 되나?

 

나는 그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대한제국, 고종 황제, 나치라고 부르는 것이 속 편하다고 생각한다. 실상과 명칭이 상당히 어긋난다는 점을 명심하기만 하면 된다.

 

 

 

 

 

민족주의
 

천황이 아니라 일왕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흥분하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보통 민비가 아니라 명성 황후라고 불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것을 보면 그런 사람들이 엄밀한 명칭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면 무작정 높여주고 남이라고 생각하면 특히 적이라고 생각하면 무작정 깎아 내리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과 다른 민족을 구분하고 우리 민족을 무조건 높이려는 태도를 국수주의 또는 민족우월주의라고 한다.

 

일본이 20세기 초에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엄청난 악행을 한 것은 사실이다. 민족주의자들은 이런 것에 앙심을 품고 일본어, 일본 문화 등을 깔아 뭉개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아직까지 이런 생각이 어느 정도 남아 있어서 방송에서는 일본어에서 유래한 말을 의도적으로 쓰지 않으려고 한다.

 

일본어에 무슨 죄가 있나? 그리고 모든 일본 사람에게 죄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주적은 일본에 있던 제국주의자들이었다.

 

세계시민주의자들이나 국제주의자들도 제국주의에 반대할 수 있다. 민족주의자들은 대체로 제국주의 국가와 관련된 모든 것을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국제주의자들은 제국주의자들만 주로 겨냥한다는 차이가 있다. 나는 국제주의적 반제국주의 운동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봉건주의
 

많은 사람들이 왕자, 공주, 왕, 황제 등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 같다. 만약 왕과 황제를 긍정적으로 본다면 왕보다는 황제가 더 위대하다고 볼 것이다. 일부 한국인들이 천황 대신 일왕이라고 부르려고 하는 이유는 더 위대해 보이는 천황라는 명칭 대신 덜 위대해 보이는 왕이라는 명칭을 쓰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왕국이든 제국이든 백성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체제이며 왕과 황제가 그런 나쁜 체제의 수장이라고 보는 사람은 왕과 황제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왕이 나쁜 놈이면 황제는 더 나쁜 놈이다. 따라서 일본의 왕을 천황으로 부르든 일왕이라고 부르든 별로 집착할 이유가 없다.

 

나는 천황과 일왕의 차이를 매우 중시하는 사람들이 민주공화정보다는 왕정을 더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대체로 민주공화정을 더 선호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들의 머리 속에서는 어느 정도 해리가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민주공화정과 왕정을 비교할 때에는 왕정이 나쁜 체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냥 왕, 왕국, 공주, 왕자 등을 생각할 때에는 상당히 긍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세상에 좋은 왕정은 없었다. 이것은 세상에 좋은 강간범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수 많은 여자들은 강간 살해한 아주 나쁜 강간범과 한 번 강간한 후 뉘우치고 다시는 강간을 하지 않은 덜 나쁜 강간범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던 더 사악했던 왕과 그냥 착취하고 억압만 했던 덜 사악한 왕이 있었을 뿐이다.

 

 

 

2010-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