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와 라캉? 사회철학, 역사철학, 정치경제학 vs. 정신분석학?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입니다. 맑스의 철학은 사회, 역사에 대한 것이고 정신분석학은 "개인"을 다루는 것이어서, 정신분석학이 맑스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일 이유가 전혀 없을 테니 말입니다. 사실, 라캉은 16년 째 매주 진행되던 강의에서 맑스에 대해서 거의 언급을 하지 않다가 1968년의 강의에 와서 맑스에 대해 언급을 합니다. 물론 헤겔과 묶어서 말이죠. 왜 1968년에 와서야? 무엇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프랑스의 68혁명 이었을 것입니다.

이전에 썼던 <안과 밖, 정체성, 정체성 정치학>에서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상상적이라고 썼었습니다. 그 글에서, "나와 나 아닌 것의 투쟁"으로 대표되는 신채호의 역사관은 헤겔주의적 역사관(그리고, 이를 그대로 반복하는 맑스주의적 역사관)을 표명한다고 썼습니다. 여기서 헤겔주의적 역사관이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의 주인과 노예 사이의 목숨을 건 싸움과 이를 통한 역사 전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신채호의 역사관은 나와 나 아닌 것의 이분법을 통해, 식민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이분법을 통해, 식민지 시대에 민족이라는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의 정립에 이론적, 실천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겠죠. 이러한 "상상된" 것으로서의 민족이라는 자기의식은 나와 나 아닌 것과의 상상적인 관계를 통해 정립이 됩니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의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마치 어린 아이들 사이의 경쟁(rivalry)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상상적 관계는 시기, 질투, 공격성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관계들을 통해 아이는 자아 정체성을 정립하는데, 이 정체성은 상상에 기반해서 정립됩니다. 민족이라는 자기의식이 상상에 기반해 정립되는 되는 것처럼 말이죠.

(물론, 이 민족이라는 자기의식이 상상적이라고 해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민족이라는 자기의식은 상상적으로 구성되는 하나의 실체인데, 어떤 효력을 지니는 실체입니다. 그리고, 이는 민족이라는 공동체가 구성되는 상상적, 상징적, 실재적 구성 중에서 하나의 구성 방식이겠네요.)

<안과 밖, 정체성, 정체성 정치학>에서 맑스에 있어서의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도 "나와 나 아닌 것의 투쟁"이라는 상상적 관계에 기반해 있다고 언듯 썼습니다. 이덕하님이 Wilkinson을 인용하면서 언급했던 "시기"라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이러한 상상적 관계 하에서라면,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는 나와 나 아닌 것의 이분법에 갇힐 뿐입니다. 시기, 질투, 공격성이라는 상상적 관계 하에서라면, 시기, 질투, 공격성 말고는 다른 관계들이 들어설 어떤 여지도 남지 않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가난한 것인가?"를 통해 구성되는 시기와 공격성은 노동자를 시기와 공격성의 굴레에 묶어둘 뿐이겠죠. 그리하여, 노동자 계급 자신이 위치하는 착취와 억압의 사회 체계, 사회 구조를 깨뜨릴 가능성도 희박해질 터입니다. 단적으로, 조합주의, 혹은 조합 이기주의를 그 예로 들 수 있겠네요. 혹은 자본가를 향해 시기와 공격성을 날리던 대기업 노조가 하청노조 혹은 비정규직 노조의 시기와 공격성의 대상이 되는 악순환 같은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겠네요. 이러한 예들은 단지,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 정치학의 여러 형태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시기와 공격성은 하나의 좋은 선동 수단이기도 하겠네요. 자본가의 "배때지"라는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선동의 효과는 꽤나 강력하겠네요. 물론, 이는 이미지라는 상상에 기반하겠네요. 선동은 이 이미지로부터 시작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끝나서는 안되겠죠. 이는 Wilkinson 같은 자본을 대표하는 이데올로그들이 원하는 것이기도 하겠네요.

그리하여, 이제 시기와 공격성과 같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상상적 관계 말고, 다른 관계들을 말할 차례입니다. 노동자의 투쟁은 "왜 나는 이렇게 가난한가?"를 둘러싼 투쟁들 가운데, 임금을 올려받기 위한 것도 중요하겠지만, 종종 그 모순과 억압을 발생시키는 사회 구조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모순과 억압, 착취, 노동 소외를 밝힌 것이 바로 맑스의 <<자본>>이겠죠. 이를 통해 시기와 공격성과 같은 상상적 관계를 넘어서는, 돈, 재화, 노동, 노동 소외 등과 같은 개념으로 구성되는 상징적 관계를 말할 수 있겠네요. 라캉에 있어서 언어라는 상징을 통해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처럼, 정치경제학의 세계에서는 돈이라는 상징을 통해 재화를 교환하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체계에서는 여성이라는 상징이 교환 가능한 것처럼 말이죠.) 따라서 여기서의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는 이 돈, 재화, 노동, 착취와 억압을 둘러싼, 상징을 둘러싼 투쟁이 되겠네요. 이는 말 그대로 "상징 투쟁," 혹은 "인정 투쟁," 혹은 "정치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노동 조합의 정치 투쟁 금지와 제 3자 개입 금지 같은 것은 노동자를 시기와 공격성이라는 상상적 굴레에 가두기 위한 자본의 전략이겠네요. 이를 극복하는 것은 노동자 계급의 착취와 억압에 대한 근본적인 구조적 모순, 즉 상징으로 구성되는 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되겠네요.

노동, 재화, 교환 수단으로서의 화폐, 시장에서 교환되는 노동, 이것에 매겨지는 가격인 임금 등등은 모두 아담 스미스와 리카르도와 같은 고전 경제학자들이 말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맑스의 위대함은 저와 같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상상적, 상징적 관계들을 가능하게 하면서도, 언제든지 저 관계들을 파괴시킬 수 있는 잉여노동, 잉여가치의 발견에 있다고 라캉은 지적합니다. 이 잉여가치, 잉여노동을 둘러싼 투쟁이 어떠할지는 잘 떠오르지 않네요. 간단하게 라캉식으로 말해서, 혹은 유토피아적으로 말해서, 순수하게 노동이 선사하는 즐거움을 둘러싼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마치, "잉여"인 저 자신이 잉여로서의 글쓰기가 주는 즐거움과 같은 것을 즐기는 것과 같이 말이죠. 물론 "글쓰기"는 하나의 고통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즐거움이겠네요. 혹은, 고통을 감내하는 즐거움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