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犬仔論' 에 할말많은 '늑대새끼 20대'
부제 : 이제 창과 방패를 내려놓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자.

glittered with. SexyDolphin


1. 자기인식 그리고, 역사인식


 성공을 향한 자기관리는 이내 작심삼일이 되어버린다. 본디 ‘성공’ 이라 함이 또 다른 창조의 놀이를 갈구하는데 있어서
그저 잠시 쉬어가는, 종전의 ‘실패’ 가 누적된 총합에 불과함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그대는 ‘성공’ 을 향하는가? 그러나, 애초에 질문이 잘못되었다.

 자의든, 타의든 주어져버린 삶을 통해 그대가 원하고 구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보다 맘에 와 닿는 질문이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 자신만의 이상향과 소망을 품는다. 때론 삶과 죽음을 초월할 정도로.
이는 인간의 순수한 추상적 potential 이 동, 식물과 완벽히 차별화되어 있는 점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그것들을 존중하는데 있어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러한 우리 인간의 진보적 천성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역사도 우리의 이상향과 소망을 먼저 ‘긍정’ 해주지 않았다.
(단, 순수한 추상적 potential 이란 마음에 마음을 반영할 수 있는, 우리의 ‘신 앞의 평등적 신성’ 을 의미한다.)


 사람 ‘들’ 은 늘 ‘무지로부터의 진보’ 를 그저, ‘사는 게 다 그렇지, 너도 별거 없어, 사람이 다 똑같거든‘ 식의 방관자적 견지에서, 공자님 맹자님 왈 식의 '샌님우월적', 인격차원 문제로 승격, 환원하여, 과거의 역사가 물려주는 ’안이함의 편리‘ 를 답습하는
안타까움을 ’절대 진리화‘ 해왔다.


 그러나 천성이 진보인 인간이 답습의 답답함에서 웃고 떠들고만 있을 리 만무하다. 인류 역사의 변화는
이러한 인간의 진보적 천성에 의해서만이 가능했으며, 이는 자연과 우주의 원리적 핵심이 ‘부단한 창조’ 임과 똑 맞아 떨어진다.


 한편 인간의 진보적 천성을 지탱하기에 인간 ‘들’ 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인간 ‘들’ 의 나약함을 이겨낸 인간만이 삶을 통해 ‘창조의 놀이’ 를 만끽했다는 걸.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경쟁은 이러한 인간의 진보적 천성을 보호하는데 그 기치를 둔다.
진보적 천성에 대한 보호만이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낳아버리는 비민주적 시스템의 구조적 한계, 악순환의 고리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보적 경쟁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나약함, 안이함과의 숙명적 대립을
수반한다. 이는 결코 피할 수 없다. 사람과 사람 ‘들’ 은 분명 상이한 메커니즘 하에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살아가든, 사람 ‘들’ 속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든 분명,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인생의 본질에 비견하면, 양자택일에 소요되는 투자비용에 대한 특별한 이익은 사실상 없다.


 확실한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은 그래도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길 원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마음에 자기, 자신만의 마음을 반영하길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맞닥뜨려야 할
나약하고 안이한 사람 ‘들’ 과의 숙명적 대립은 그저 ‘한’ 사람으로서 풀어 내어가기엔 고독하고 또 고독하다.


 우리 사회의 ‘진보’ 는 이 고독함을 발산하는 방식을 ‘집단적 투쟁 소위 응석부리기, 땡깡’ 을 통해 민주화와 독재종식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 냈지만 보다 선진화된 게임의 룰 즉, positioning 의 진보는 7, 80년대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기정 사실이다.


 한국 사회의 ‘진보’ 는 이제 스스로의 positioning 노하우를 새로이 개발해야 한다. 필자는 ‘촛불 시위’ 가 아닌 ‘촛불 문화’ 로서 한국 사회 ‘진보’ 의 진보를 긍정적으로 기대한다.




2. positioning 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가?


 성공과 실패는 무엇에 의해 갈리는가? 노력? 배경? 이전에서 설명했듯 필자가 ‘성공’ 을 통해 되찾고 싶은 것은,
실패도 성공도 공히 ‘창조의 놀이’ 를 즐기기 위한 복선에 지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일러두는 바이다.


 ‘한’ 사람으로서의 삶이라 한들, 사람 ‘들’ 속에서 나고 진다. 즉, 진보적 천성을 발산하는데 있어서
사람 ‘들’ 과의 대립은 필연적 숙명이라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진보는 그 ‘대립’ 을 ‘투쟁’ 으로 해소해왔다.
그러나 ‘투쟁’ 으로서의 ‘대립’ 은 어느 한쪽이 반드시 terminated 되어야 비로소 종식되는 제로-섬 게임이다.
공멸이 예견되어 있는 비극인 것이다.


 인간의 진보적 천성이 ‘한’ 사람으로서 발현될 때 반드시 ‘대립’ 을 수반한다 일러두었다.
우리는 이제 현명한 ‘대립’ 의 기술을 찾아야 할 때이며 이를 positioning 즉, 유리한 위치선점 능력이라 명명한다.
비과학적이라 치부하고 마는 혈액형 성격학을 통해 그 개요를 제시하겠다.


 A형은 그들이 속해있는 조직의 표준을 수호하는 것이

 그들 positioning 의 제 1 관건이다.

 B형은 자신만의 표준을 수호하는 것이

 그들 positioning 의 제 1 관건이다.


 AB형은 자신만의 차별화를 통해 얻어지는 주도권을 수호하는 것이

 그들 positioning 의 제 1 관건이다.


 O형은 그들이 속해있는 조직에서의 주도권을 수호하는 것이

 그들 positioning 의 제 1 관건이다.


 물론, 세상에 4가지 캐릭터만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다만, 간략화를 통해
무한한 다양성이 공존하는 사회에서의 positioning 사례를 이론적으로 예증할 뿐임을 양해 바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4가지 혈액형들은 그들 positioning 의 제 1 관건이 충족되면 모두 타인과 사회에 대해 관대해지기 시작하는, 이성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성을 베푼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바로
이 ‘조건부 인간성’ 을 윈-윈 게임으로 긍정적 승화시키는 전략으로써 positioning 을 다시 한 번 명명한다.


 개인의 혈액형은 단 하나다. 따라서, 진보를 통한 창조의 놀이를 만끽하고자 사람 ‘들’ 과 대립할 수 밖 에 없다.
사람 ‘들’ 은 수많은 혈액형들의 수학적 조합으로 시스템화 될 수 있다. 우리는 사람 ‘들’ 의 갖은 캐릭터가 표준화된
하나의 지배적 흐름으로 최종 합됨을 익히 경험하기 때문이다. 소위 ‘대중의식, 집단의식’ 이라 명명한다.


 따라서 그 최종 합이 향하는 목적지 또한 간파하여 그 목적지로 향하는 대중 ‘들’, 집단 ‘들’ 의 positioning 이 추구하는
제 1 관건을 먼저 ‘충족’ 시켜줘야 한다. 소위 ‘비즈니스, 사업수완’ 이라 회자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남 ‘들’ 이 원하는 것을 먼저 ‘충족’ 시켜줘야 한다는 것이다.
남 ‘들’ 이 원하는 것을 먼저 ‘충족’ 시켜주기 위해선 따라서, 내가 뭐라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떡밥, 미끼’ 이라 명명한다.


 자, 이제 진보의 행동만이 남았다. 소위 ‘힘’ 이 없다면 진보는 ‘힘’ 을 키워야 한다.
그래서 보수가 답습해온 ‘힘’ 보다 더 맛있는 ‘떡밥, 미끼’ 를 준비해야 한다. 준비하지 못했다면 한 번 더 기다려야 한다.
또 다른 행동을 준비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축적해둬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의 인간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3. 개인 그리고 진보의 자기관리

부제 : 정의와 평화, 돈과 권력 ... ... 그저 다양한 캐릭터의 일부에 불과할 뿐


 진보든, 보수든, positioning 의 제 1 관건이 충족되지 않고서야 아무리 옳아 보이는 새 것에 대해 행동하길 꺼려한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 또는 인간 ‘들’ 의 ‘인격적 한계’ 로 인정해야한다. 따라서 또한, 정의와 평화가 상실되었다 식의
선민주의적 positioning 으로는 결국 소아병적 소영웅주의로, 보수 진영에 의해 소리없이 폐기됨을, ‘진보’ 는 인정해야한다.


 여기서 ‘자기관리’ 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힘’ 은 ‘자기관리’ 의 소산이다.
‘떡밥, 미끼의 맛’ 은 결코 하루 아침에 마련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를 따르라’ 식의 선민주의적 positioning 을 대체할 보다 강력하지만, 보다 효율적인 positioning 이 필요하다.


 필자는 우리의 ‘인격적 한계’ 를 개선하자는 곧, 사람 ‘들’ 의 자발적 참여를 요구하는 식의 한계를 절감한다.
오히려 ‘보수’ 가 ‘진보’ 의 ‘창조적 문화, 재밌는 문화’ 에 관심을 갖도록 진보 스스로 ‘문화의 양성’ 에
개인적, 사회적 에너지를 투자하는 긍정적 전환을 기대한다.


 문화의 양성은 positioning 의 이해타산적 한계를 넘어서 진보가 즐기면서 보수도 유혹할 수 있는 ‘대립 아닌 대립’ 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자기관리’ 라는 개념을 도입해 문화의 양성을 ‘자기관리의 사회화’ 로 확장한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많고 소위 ‘꺼리’ 가 많은 사람이면 주위에 알아서 사람 ‘들’ 이 모여드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즉, 내가 옳다, 너가 틀리다 식의 논쟁에 쏟을 에너지를 상대를 유혹할 수 있는 ‘끼’ 를 기르는데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4. 세상과 우주에 대한 인식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은 그 파동을 반복하면서 삶의 방향을 죽음으로 이끌고 죽음의 방향을 삶으로 이끈다.
진보와 보수, 보수와 진보도 그 파동을 반복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destination 이 되어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무엇이냐, 진보와 보수가 무엇이냐 서로의 '진정성' 을 따지고 드는 것은
세상과 우주에 대한 인식의 결여로 귀결되며 결코 '마음이 가벼워지는 창조적 놀이' 에 다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찰리 채플린이 그랬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데,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양자 물리학은 물질과 에너지 역시 주관적 허구에 불과하며 오직 ‘정보와 마음’ 만이 객관적 실재 임을 말해준다.
세상과 우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역사는 파동의 반복에 불과하며 따라서,
서로가 싸워야 할 투쟁의 대립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즐기는 ‘유혹의 대립’ 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 창과 방패를 내려놓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