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글입니다! 이 글의 제목이 왜 민주주의의 개화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기가 민주주의가 꽃피기 시작하는 시점이라는 의미에서였을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노자에게 비유하는 것은 지나치다 할만 하지만  
그는 진정 의식이 깨어난 뛰어난 대통령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역사가 한 20년 정도는 흐른 뒤,
만일 우리가 진정한 민주 시민의식을 갖고 살면서 참 민주주의를 구현했을 때에나 다시금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그대 함부로 그를 욕한다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손가락질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참 민주 시민의식을 가질 때에만 이땅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09. 7. 19.     14:42

옛일을 돌아보며 민주주의를 생각해보는 
<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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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노자를 비웃는가?

 

노자를 비웃는 사람들은 지금도 많다. 사람들은 자기 이해의 짧음과 경험의 부족으로 노자를 이해할 수가 없으니 터무니 없는 소리를 했다고 비웃었을 것이며, 2천년이 지난 오늘날 현대인들도 여전히 노자를 모르고 있다. 심지어 노자를 안다고 하는 학자들이나 자칭 완벽한 번역가라고 하는 사람도 노자를 웃기고 있다. 정말 웃기는 노릇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다면 노자는 도덕경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가?

 

노자가 한 권의 책을 남기고 떠난 이래 6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주해서를 썼다고 한다. 노자의 도덕경이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똑똑했던 학자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노자를 이렇게 이해했다고 하면서 주해서를 썼다. 심지어 왕필 같은 사람은 천재였다고 칭송받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의 주해서를 보면, 여전히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처럼 들릴 뿐이다.

 

도대체 노자의 도덕경이 어떤 내용에 관한 것이기에 2천년이 지나도록 똑똑하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비밀의 뚜껑을 열지 못하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을 말했길래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명작이 아니냐면 자신들의 몰이해를 합리화하고 있다. 그런데 만일 당신이라면 그렇게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의문을 제기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는 무엇일까? 지식의 세계에 관한 것이라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밝혀내지 못할 수가 있을까? 아니다. 지식이라면 학문의 발전과 또 뛰어난 학자들의 탄생에 힘입어 점점 더 명확하게 밝혀질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이해불가득한 어떤 세계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일 아닐까? 그런데 노자 역시 사람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노자의 도덕경이 무엇을 말하는 가는 도가도 비상도라는 단 한 구절에 답이 들어있다. 이에 대해 고찰해 보기 전에, 사람들은 왜 노자를 아니 노자가 한 말을 듣고 비웃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들의 수준에서는 터무니 없는 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과연 사람들은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있을까? 예수는 또한 누가 왼쪽 뺨을 때리거든 오른뺨도 내주어라고 가르치고 있다. 과연 이해할 수 있는 소리인가? 사람들은 아마도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이성적으로는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 자기의 원수를 사랑할 사람이 있겠는가? 없을 것이다.

 

이렇듯 노자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세계를 말하고 있음이 틀림이 없다. 일반인들의 정신세계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수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히려 노자를 비웃고 또 심하게는 바보 같은 놈이라고 욕도 했을 것이다.

 

이 시점에 사람들이 인식하는 과정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사실 배움이라는 것을 통해, 혹은 경험을 통해서 우리들은 많은 지식을 얻게 된다. 그런데 깊게 생각해보면 어떠한 지식들은 자신이 명확하게 알고 있는 점이 아니라, 책을 통해서 배워서 알거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게 되거나 한다. 그런데 그렇게 알게 된 것은 경험을 통해서 진짜로 알게 된 것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불이 뜨겁다고 배워서 아는 사람과 활활 타오르는 불에 손을 데어 불의 뜨거움을 안 사람과는 뜨거움에 대한 느낌이 천양지차와 같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불이 뜨거운 것을 경험을 통해서 꼭 알아볼 필요는 없다. 그렇지 않더라도 간접경험을 통해서 어느 정도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경험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본 사람이 산고(産苦)를 아는 것과 평생을 처녀로 살아서 아이를 낳아보지 못한 사람이 아는 주워들은 산고와는 엄청난 차이가 날 것이다. 직접 고통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간단하게 묘사를 하더라도 아 그게 어떤 것이라고 대번에 알아 맞출 수가 있으나, 경험을 해 보지 못한 사람은 제대로 알 수가 없을 것이다.

 

혹시 노자는 이렇게 직접 경험해 본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면에 그의 주해서를 썼던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과 학식을 가지고 도덕경을 논하는 것은 아닐까? 즉 노자는 일반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그 무엇에 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노자는 과연 무엇을 경험했을까?

 

노자의 도덕경을 보면 사물의 인식방법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상대적인 관념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던져보겠다. ()은 과연 있는가? 아니 선은 무엇인가?

 

사실 어떤 행위에도 선하다고 할 수 있는 절대세계는 없을 것이다.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선하다고 할 수 있는가? 아마 일반적인 인식방법에 의하면 선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보편적인 행위일 뿐, 결코 선하다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적인 관점에서 보게 된다면 선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한 어머니가 자식을 학대를 하는데 비하여 다른 어머니가 자식을 끔찍이 사랑한다면 선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또 보자.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어머니가, 이웃의 다른 아이를 때리거나 못살게 한다면 그 어머니의 자기 자식 사랑을 선하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세상에는 절대 선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다만 사람들의 인식에 따라서 선하지 않은 다른 상황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나 선하다는 개념이 자리잡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절대 세계에 살지 못하고 상대 세계에 머무를 뿐이다.

 

그러므로 누가 당신을 선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즐거워 하지 마라. 다만 언젠가 악하다고 불릴 날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상대적인 선이 아닌 절대적으로 선한 것은 없는가? 상황에 따라 인식되는 상대적인 세계가 아닌 언제나 선함을 말할 수 있는 절대세계는 없을까? 인간의 의식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절대의 세계, 이 물질계가 아닌 비물질계의, 우주를 관통하는 차원이 다른 세계, 노자는 그 세계를 경험하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 나는 여기서 노자 도덕경을 바탕으로 하여, 노자라는 인물을 그려보고자 한다. 이는 단지 나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묘사하는 것이니, 사실이라고 오해는 하지 마시길 바란다.

 

노자는 언제나 온화한 모습을 하고, 늘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된 소리를 해 주는 이웃의 할아버지와 같은 분이시다. 좋은 옷은 아니지만 늘 청결한 옷을 입고, 단아한 걸음새에 절대로 허둥대는 법이 없을 것이다. 아이들과도 잘 놀아주면서 이웃 사람이 부탁을 해 오면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주는 욕심이 없는 그런 분일 것이다. 집에는 재물이 많지도 않고 먹을 것도 많이 쌓여 있지가 않다. 밤에는 잠을 자고 낮에는 들에 나가 일을 하고 가끔은 책을 보기도 한다. 언제 보아도 늘 만면에 웃음이 떠나지를 않는다. 이처럼 노자는 우리 주위에 흔한 인자한 할아버지와 같은 모습을 하고 계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욕심이 없어, 관직에 나아가는 것도 마다하고, 재물에도 욕심이 없어 애써 재물을 모으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사람들 앞에서 나서기도 싫어하여 언제나 뒤에서 묵묵히 마을을 위해서 일할 뿐이다.

 

그는 이미 사람이 겨우 백년도 안되는 시간을 살다가 죽는 한계성을 알고 있었다. 왕이든 재상이든 모두가 죽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하늘을 자처하는 왕이라도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그런 것을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결국은 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을 뿐 많이 먹으면 소화하느냐 힘들고 몸이 불어 고생만 할 뿐이기에 소식하며 때로는 며칠씩 먹지 않아도 전혀 배고픔을 모른다. 그러니 재물에 욕심을 내지도 않는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는 평범하게 보이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만인이 평등하고 결국은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알고 이웃의 아이를 자기 자식처럼 대하고,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존엄한 인간임을 안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한다.

 

세상에 나서 살아가기 위해서 수장실사라는 관직을 얻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명리에 버렸기에 승진을 하려고 애를 쓰지 않고 다만 맡은 바 일을 충실하게 처리하고 일과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편하게 쉬면서 책을 본다. 그리고.. 시간을 내어 우주와의 소통을 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렇듯 살다 보니 어느덧 세월은 흘러 백발이 성성하여관직을 내 놓고, 고향으로 향하게 된다. 세상에 나가 이름을 날리지 않았으나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아 마음은 언제나 평화롭다.

 

고향으로 내려갈 적에 해걸음에 관문에 도착하여 하루밤을 유하고 갈 것을 묻자 사람 좋은 관문지기가 흔쾌히 허락을 하고, 저녁상까지 내어오면 말을 건다. 노자의 기품이 있고 온화한 인상에 감복한 수문지기는 앞으로 인생을 살아갈 때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해 주실 것을 부탁한다. 세상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는 잘 먹고 잘 살기만을 희구하건만 이 젊은이는 마음씀도 아름답고 또 예의도 바르기에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가르침을 전한다.

 

세상의 이치에 대하여 일러주며 인생을 어떻게 영위하여야 하는가에 대해 사랑하는 자식에게 이야기 하듯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자 관문지기는 그 말씀을 받아 적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세상의 이치를 궁구하기 위한 정신수련방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어찌어찌 하는 수련하는 방법을 알려주고는, 다음날 날이 밝자 길을 떠난다.

 

이렇게 하여 노자의 도덕경이 세상으로 던져지게 되었으나 노자가 관문지기에게 자세하게 해 준 이야기는 전하여지지 않고 있어 수많은 억측이 나돌게 된 것이다.

 

노자의 도는 우리가 그려볼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이야기일 것이다. 인간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우주 원리에 대한, 절대세계에 관한 이야기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경험과 직관의 세계이지 지식의 세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보통인간의 머리로는 도덕경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노자는 뛰어난 학자들이라고 해도 결코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범상한 인물은 아닌 것이었다. 그러니 노자 래로 수많은 지식있는 자라고 해도 결코 노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 시대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지식인들조차 겨우 자신들의 의식수준에서 노자를 평가절하해서 해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노자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위대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으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그를 말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왕이라도 해서 함부로 백성들을 죽이거나 살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의 영토를 넓히려고 전쟁을 하는 것은 아이들만도 못한 우매한 짓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배우지 못하고 천하다고 해서그렇게 대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이웃을 따뜻한 사랑으로 대했던 것이다.

 

우리 인류의 역사 속에는 노자와 같이 평범하게 사람들 속에서 묻혀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들을 몰라보았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사회를 돌아보면 조금 배웠다고 해서 난 체를 하거나 지식인이라고 해서 권위를 가지거나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뻐기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은 모두가 다른 사람들의 도움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절에서 사는 스님이라고 해도 의존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가 못하다. 사람들의 시주가 있어야 먹고 살고, 또 산 속에 있는 밭에 곡식을 심어 먹고 산다고 해도, 또한 자연에 의존하여 사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 사람의 몸을 갖고 태어나는 이상 우리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의존하여 살아가야만 하는 불완전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나를 존재케 해주는 상대를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을 살펴보자. 자신의 기술이나 영업력이 좋아서 많은 돈을 벌어 호위호식하고 있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해주는 덕분으로 자신도 살아가고 또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온전한 자기 노력의 결과만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고자신이 쓸 만큼을 제외하고는 내 놓아야만 하는 것이 진정으로 보답하는 길인 것이다. 그러나 욕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재물에 빠지게 되는 사람은 평생을 재물만을 모으며 살다가는 한푼도 가져가지 못하고 갑자기 죽고 마는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엉뚱한 자식들만 호의 호식하게 되는데 정당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자식들에게 많은 돈은 오히려 그들의 정신만 좀먹게 된다. 오히려 재물을 물려받지 못함만 못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명문대학을 나와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그렇게 대접받기에는 평범한 무수한 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참으로 감사하면서 살아가야만 할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있다. 판사, 변호사라고 해보아도 겨우 법에 따라 판결하고 또 법을 따라 사람들의 다툼을 변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지식이라는 것이 법률이라고 하는 어찌보면 하찮은 지식을 이용해 먹고 사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거기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가 있을텐데,,, 명예를 얻을 수가 있기에 이전투구를 하면서 그런 자리를 얻으려고 한다. 타인을 위해서 봉사하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기 보다는 욕심을 채우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도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정치인들은 당리당략에 따라 움직이는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한 차원 높은 의식 수준으로 살펴보면 이름이 있는 많은 사람들도 어리석은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네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라고 이야기 하니, 예수인들 노자인들 비웃음을 당하지 않겠는가? 웃기는 소리라며 코웃음을 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는 비웃음을 당하고 욕까지 먹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토론을 한답시고 이전투구나 일삼고, 잊혀 질만하면 불쑥 나타나 언쟁을 하고 욕지거리를 퍼붓다가 걸핏하면 소송을 한다고 하고, 스스로 자신의 잘난 점이나 이야기 하고, 무엇이든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을 하더니, 완역이라며 엉뚱한 해설서를 내놓기가 무섭게 노자를 비웃기라도 하듯 터무니 없는 자신의 주장만 일삼으며 혹세무민하고 있으니 노자가 어찌 웃지 않을손가!

 

노자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한탄을 하겠는가!

 

하늘을 두려워하고, 노자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다.

 

 

2004. 4.3. 21:15

 

 

노자를 비웃는 사람들을 혼내는 고서

김 선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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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두산백과사전에 전재

 

성명 이이(李耳). 자 담().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나라 고현(苦縣:허난성[河南省] 鹿邑縣) 출생.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주()나라의 수장실사(守藏室史:장서실 관리인)였다. 공자(BC 552~BC 479)가 젊었을 때 뤄양[洛陽]으로 노자를 찾아가 예()에 관한 가르침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퇴할 것을 결심한 후 서방(西方)으로 떠났다. 그 도중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上下)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고 하며 도덕경(道德經)(2)이라고도 하는데, 도가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전기에는 의문이 많아, 노자의 생존을 공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사상】 노자는 도()의 개념을 철학사상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며, 이 도는 천지만물뿐만 아니라 상제(上帝)보다도 앞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형상과 소리가 없어서 경험할 수도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지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생성 소멸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가 아니라 유()이다. 천지만물과 달리 도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자연(自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간섭·지배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위(無爲)하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가 만약 이러한 무위자연을 본받아 백성들을 간섭 ·지배하지 않고 그들의 자발성에 맡긴다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진다. 노자에 의하면 일체 사물 ·사건들은 그들 자신과 상반하는 대립자들을 지니고 있다. ()가 있으면 무()가 있고 앞이 있으면 뒤가 있다. 이들 대립자들은 서로 전화한다. 화는 복이 되고 흥성한 것은 멸망한다. 이러한 대립전화(對立轉化)의 법칙을 알고 유()를 지키면 강()을 이길 수 있다. 이를 귀유(貴柔)사상이라고 한다.

【전개】 노자사상은 열자(列子)와 장자(莊子)에게 계승되었다고 한다. ()나라 초기에 성행하였던 황노(黃老)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한고조(漢高祖)는 오랜 전란에 시달려온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파괴된 생산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자의 무위자연사상을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동한(東漢) 말엽에 도교를 창도한 장도릉(張道陵)이 노자를 교조(敎祖)로 추존(追尊)하고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을 신도들이 외우고 익혀야 할 경전으로 받들어 노자사상은 도교의 교리가 되었다. 위진시대(魏晉時代)하안(何晏)이 도덕론을 짓고 왕필(王弼)이 노자주(老子注)를 저술함으로써 노자사상은 위진 현학의 기본사상이 되었다. 또한 인도에서 들어온 불경을 해석하는 데 노자의 용어와 이론이 활용되어 격의(格義)불교 형성에 이바지하였다.

한국에서는 상고시대 이래의 신선사상이 삼국시대에 이르러 도가사상과 결합, 풍류를 숭상하는 기풍을 조성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재난을 없애고 복을 기원하는 과의(科儀)도교가 성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산림(山林)을 찾아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선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