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이번 편을 쓰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네요. 별 내용도 없는데 쓸데없이 길어지기만 하고 있네요; 본격적인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신문기사 하나 보고 시작하겠습니다. 올해 내로 한미FTA가 비준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내용의 신문기사입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18/2010011800054.html

 이 기사를 보면 미국이 한미FTA에 대해 별로 의지가 없다는 걸 느낄 수 있죠. 우리가 먼저 비준함으로써 미국에 압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분들이 있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별로 맞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지금처럼 한미FTA가 흐지부지돼버리면 소위 4대 선결조건은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내준 게 되는 셈이죠.    


 …(전략)…한국과의 FTA 추진에 시큰둥한 미국의회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그들이 솔깃하게 생각할 몇 가지 사안에 대해 전향적인 문제해결 의지를 보여줘야 했다. 스크린쿼터를 반으로 줄이고, 미국 쇠고기를 부분적으로 수입재개 한다는 합의는 모두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한국정부가 미국과의 FTA 추진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전략이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의회에서 미국 USTR 롭 포트먼과 함께 협상개시를 선언할 만큼 미국의회에 공을 들였다. 어찌 이를 두고 졸속 협상이라고 비난할 수 있으랴.

                                                                                                                         -<한미FTA 역전 시나리오> 398p 중에서


 참고로 이 책 쓴 분은 '시민단체인 바른사회시민회의 사무총장을 역임하면서 시장경제와 법치주의의 기치 아래, 건전한 중도세력을 형성하는 데 공헌했'으며, '한미FTA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FTA 바로알기 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분입니다. 지금도 하시는지는 모르겠고...어쨌든 지금같은 분위기로는 스크린쿼터나 미국 쇠고기를 그냥 아무 이유없이 내준 걸로 될 가능성이 꽤 있습니다. 

 흘러가는 모양을 봤을 때, 미국이 한미FTA를 제안하기는 했어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미FTA를 강력한 의지를 갖고 추진했다는 생각은 안 들고, 한국정부는 몸이 달아서 '이건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우리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미국이 별로 할 생각이 없으면 안 되는 게 현실이죠. 한미FTA 협상 추진하신 분들은 다른 협상을 하실 일이 있으면 최소한 그런 점은 좀 염두에 두고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6. 한미FTA는 한국 경제의 체질을 바꿀 것인가?-한미FTA의 특수성


 한미FTA의 핵심은 상품 관세를 내리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비관세장벽', 즉 법과 제도를 바꾸고, 장기적으로는 경제 제도와 사회 체제까지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단은 미국의 구상이 그러했고요.

…(전략)…미국의회조사국 보고서라는 게 있습니다. 미국의회 조사국은 미국에서 매우 권위 있는 연구기관입니다. 작년 5월 20일자 보고서를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한미 FTA의 목표는 관세장벽보다 비관세장벽을 무너뜨리는 데 있다."…(후략)…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147p~148p 중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미 FTA는 그것을 통해 물건을 더 파는 것보다는 제도를 미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하는 것이다. 각 분야의 세계의 제도와 뒤섞이지 않으면 수준이 올라가지 않기 때문이다"(5월14일, 두바이 동포간담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593022
이 기사를 보시면 이 외에도 한미FTA에 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은 한미FTA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동의하는 부분이고요. 즉, '한미FTA는 단순히 경제의 영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법과 제도, 더 나아가 한국 사회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는 협정'이라는 인식은 찬성론자들이나 반대론자들이나 대체로 공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미FTA의 목표가 정확히 그것인지도 모르죠.


 그런데 미국식 FTA는 맞춤형이 아니라 기성형(旣成形)이다. 미국은 어느 경우든 상대국과의 사정과는 관계없이 높은 수준의 포괄적 FTA만을 주장한다. 한미FTA도 예외가 아님은 물론이다. 로버트 포트먼(Robert Portman) 당시 미국통상대표부 대표는 이미 2006년 2월 3일 협상 개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부터 한미FTA는 "포괄적인 협정이 될 것"임을 천명했고, 같이 있던 미국통상대표부의 한 고위관계자도 "우리가 한국 측과 협상할 FTA는 (미국이 향후 체결할) 모든 FTA의 금과옥조"가 될 것이라며, "이번 협정은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높은 수준의 FTA가 될 것"임을 분명히 했다.(<동아일보> 2006.2.3) 실제로 미국은 2007년 1월 현재 6차까지 진행된 한미FTA 협상에서 줄곧 높은 수준의 포괄적 FTA의 체결을 강조하고 있다. 제조업은 물론 농업과 써비스업 시장의 고도개방과 새로운 통상분야의 자유화 등 앞서 본 미국식 FTA의 정형 그대로를 한미FTA의 내용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요구가 관철될 경우 한미FTA는 경제소국이 경제대국과 맺는 높은 수준의 포괄적 FTA, 즉 비대칭적 경제통합 협정이 된다.

                                                                                                                         -<한국형 개방전략> 122p~123p 중에서


 이러한 특성은 미국형 FTA의 특수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번에 보면서 머리가 아팠지만 -_; 미국형 FTA의 특징에 대해서 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무역기구에서는 FTA를 지역무역협정(RTA)의 한 종류로 보고 있는데, 세계은행의 「'05년 세계전망 보고서」에서는 FTA의 서비스, 투자분야 개방방식을 기준으로 미국형, 유럽연합형, 개발도상국형(남-남 형) FTA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표를 한번 보시죠.


표4 지역무역협정의 다양한 유형

 

표준

운송

통관

써비스

지적

재산권

투자

분쟁해결

노동

경쟁

미국

요르단

×

×

칠레

×

싱가포르

×

호주

×

중미자유무역협정

×

×

모로코

×

×

북지자유무역협정

×

유럽연합1

 

 

 

 

 

 

 

 

 

유럽연합

 

 

 

 

 

 

 

 

 

남아프리카공화국

×

×

×

×

×

×

멕시코

2

2

×

칠레

2

×

지중해

×

×

×

×

×

×

2

남․남

 

 

 

 

 

 

 

 

 

안데스공동체

카리콤

아세안자유무역협정

×

×

×

남아프리카개발공동체

 

 

×

×

 

 

동남아프리카공동시장

기타

 

 

 

 

 

 

 

 

 

일본․싱가포르

×

캐나다․칠레

×

×

칠레․멕시코

 

▪출처: World Bank 2005.(<한국형 개방전략> 31p에서 재인용)
1. 유럽연합의 협정은 대부분의 분야에 대해 협력을 언급하나 특정한 관여(specific commitments)가 보이는 부분만 ○ 표시했음.
2. 실행단계는 추후에 보임.


 보시다시피 미국형 FTA는 운송 분야를 제외하고는 상대국이 어떤 나라가 됐든 모든 분야를 개방하는, 포괄적인 FTA를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르단과의 협정에서 표준 분야를 개방하지 않은 것과 중미자유무역협정과 모로코의 경우 경쟁 분야를 개방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예외를 거의 두지 않는 아주 포괄적인 개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연합형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지중해, 그리고 멕시코와 칠레의 경우에 확연하게 개방의 폭이 차이가 나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와 지중해의 경우에는 지적재산권과 분쟁해결, 경쟁 분야만 개방을 했죠. 멕시코와 칠레의 경우에는 노동 분야를 제외하면 모든 분야를 개방한 포괄적인 협정이지만, 이것도 속을 들여다보면 미국형 FTA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2000년 들어 유럽연합이 멕시코, 칠레 등과 체결한 FTA는 정체되었던 유럽연합의 탈출구 모색 차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나라들과의 FTA는 북미자유무역협정에 비해 포괄적이지 않고, 농업개방이 국부적이며, 써비스시장 개방은 써비스 교역에 관한 일반협정 수준에 그친다. 한편 지적재산권, 분쟁해결, 경쟁정책의 조화를 중시하나, 미국과 달리 국제협약 준수만 요구하는 정도이고 논란의 소지가 큰 ‘투자자-정부 소송권’은 도입하지 않았다(단, 유럽연합 개별국은 양자투자협정에서 이를 포함).
                                                                                                                                     
-<한국형 개방전략> 35p 중에서


 개발도상국형은 크게 선진국과의 지역무역협정과 개발도상국 간의 지역무역협정으로 나뉘는데, 선진국과의 지역무역협정은 거대선진시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자국의 구조개혁과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려는 동기에서 추진되는 경향이 큽니다. 개발도상국간 지역무역협정은 주로 정치적인 이유로 추진되는 경향이 있는데, 위의 표에 있는 안데스공동체(CAN)나 카리콤(CARICOM) 등도 그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사실 미국형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분야는 써비스, 투자, 지적재산권 등의 새로운 통상분야입니다. 이러한 분야들은 세계무역기구에서도 아직 국제규범이 완비되지 않았는데, 미국형 FTA는 상대국에 관계 없이 높은 수준의 개방을 요구함으로써 이러한 분야에서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표를 보시죠.  


부표 1 주요 지역무역협정별 써비스, 투자, 지적재산권 조항의 비교

 

써비스

투자

지적

재산권

NT/최혜국/시장접근a

기업
제한
b

설립 전 &MA 예외제한

주재
의무
부과
금지
d

역진
방지
기제
e

설립 후단계, NT/최혜국

지분
제한
f

설립 전
단계 제한

이행의무부과금지

‘투자자-국가’분쟁해결

미국

요르단

포괄

×

×

포괄

포괄

TRIMs+

h

칠레

포괄

포괄

포괄

TRIMs+

TRIPs+

싱가포르

포괄

포괄

포괄

TRIMs+

TRIPs+

호주

포괄

포괄

포괄

TRIMs+

×

TRIPs+

중미자유무역협정

포괄

포괄

포괄

TRIMs+

TRIPs+

모로코

포괄

포괄

포괄

TRIMs+

TRIPs+

북미자유무역협정

포괄

포괄

포괄

TRIMs+

TRIPs+

유럽연합

남아공

×

×

포괄

×

×

×

×

×

×

×n

i

멕시코

Stand-stillc

×

×

×

×

×

×

×n

i

칠레

열거

×

×

×

열거

×

×i

i

남․남

메르코수르

열거

×

×

×

포괄

TRIMs+

×j

안데스공동체

×

열거

×

×

-

×

열거

TRIMs+

×

×k

카리콤

불명확

포괄

×

×

×

×

열거

×

×

아세안

열거

×

×

열거

×

×

×l

남아프리카개발공동체

×

×

 

 

 

×

×

포괄

×

×

TRIPs+

동남아프리카공동시장

×

열거

 

 

×g

×

열거

×

×

×m

기타

일본․싱가포르

×

열거

×

×

 

 

 

 

캐다다․칠레

포괄

 

 

 

 

 

칠레․멕시코

포괄

 

 

 

 

×

 

▪출처: World Bank 2005.(<한국형 개방전략> 50p~51p에서 재인용)
a. 공정․공평한 대우 포함
b. 체약국 내에서 실질적인 영업을 하지 않는 법인에 대한 혜택 거부.
c. Standstill. 향후 써비스 교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따른 협상을 제공.
d. 비설립권(Right of non-establishment). 써비스 공급을 위한 주재의무부과를 금지.
e. 역진방지기제. 체약국의 자율적 자유화는 자동적으로 협상에 반영됨
f. 설립 전 제외로부터 제외되는 분야의 기업에 대한 지분소유 제한.
g. 동남아프릴카공동시장은 체결국에 대해서만 공정․공평한 대우를 제공.
h. TRIPs Plus의 내용을 가지나 미국의 이후 FTA에 비해 상세하거나 포괄적이지 않음.
I. 국제협약 준수만 요구.
j. 메르코수르는 지적재산권 포함하지 않으나 지적재산권법의 조화를 위해 작업할 의회합동위원회를 제공.
k. 안데스공동체는 모든 특허에 대해 규제.
l. 아세안은 프레임워크 협정 체결.
m. 법률 128(e)는 새로운 특허법의 채택을 요구.
n. 유럽연합의 경우 양자투자협정에서는 투자자-국가 분쟁해결 채택.


 좀 복잡하긴 하지만 중요한 부분이니까 살펴봅시다. 일단 미국형은 '설립 전 & MA 예외 제한'과 '지분제한', '설립 전 단계 제한'에서 모두 예외없이 포괄 방식을 채택했는데, 유럽연합형이나 개발도상국형은 포괄주의 방식과 열거주의 방식이 혼재되어 있으며 수를 따져보면 열거 방식이 우세합니다. '지분 제한'은 유럽연합형과 개발도상국형에서는 열거주의 방식도 찾아볼 수 없네요. 개발도상국형의 아세안을 제외하면 모두 개방 자체를 하지 않았죠. 

 '설립 전 단계 제한'은 실제로 투자하기 전 단계에서의 잠재적인 투자가능성까지 권리 보호 대상으로 간주하고 내국민대우를 규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분제한'이나 'MA 예외 제한'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전문가는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포괄주의 방식은 뭐고 열거주의 방식은 뭘까요? 포괄주의(negative) 방식은 열거한 것 외에는 모두 개방해야 하는 것이고, 열거주의(positive) 방식은 열거한 것만 개방하면 되는 방식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개방의 폭에서 차이가 나죠. 그리고, 예를 들어서 1980년대에는 휴대폰 같은 건 생각도 못 했죠? 포괄주의 방식으로 협정을 체결하면 그런 분야는 자동으로 개방이 될 수밖에 없죠. 이런 점을 보면, 미국형이 다른 유형의 FTA보다 높은 수준의 개방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주재의무부과금지'는 국경간 서비스 공급의 조건으로, 상대국의 서비스 공급자에게 자국 영역 안에 대표사무소 또는 기업 등을 설립,유지하도록 하는 의무를 부과하는 것을 금지하는 원칙을 의미합니다. 미국형의 경우에는 요르단을 제외하면 모두 이에 합의했지만, 유럽연합형이나 개발도상국형은 모두 채택하지 않았죠. 얼핏 생각해도 고용 효과가 줄어들겠군요.

 '역진방지기제'란 것은 말 그대로 한번 개방한 것은 (개방의 폐해가 발생하더라도) 다시 역행시킬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e의 설명에도 나와 있듯이 상대국이 자율적으로 개방하는 경우에도 자동 적용되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미국형의 경우에는 요르단을 제외하면 모두가 '역진방지기제'(ratchet mechanism)를 채택하고 있는데, 유럽연합형이나 개발도상국형에서는 역진방지기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참고로 이 '역진방지기제'가 적용되는 대표적인 부문이 스크린쿼터와 경제자유구역입니다. 한국영화 점유율이 심각하게 저하하는 등의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개방에 역행할 수 없다는 거죠.   
   
 '이행의무부과금지'는 외국인 투자를 허용하면서, 그 조건으로 '투자와 관련한 일정 비율 수출 의무', '국내산 원재료 사용', '기술이전' 등의 부수적인 이행의무를 부과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입니다. 미국형은 이 분야에서 예외없이 세계무역기구의 부속 협정인 무역관련투자조치협정(TRIMs) 이상의 보호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유럽연합형, 개발도상국형, 거기다 기타까지 통틀어서, 메르코수르와 안데스공동체만이 TRIMs 이상의 보호를 요구하고 있고 이 둘을 제외하면 '이행의무부과금지'에 합의한 경우는 없습니다. 미국형의 경우에는 TRIMs에는 규정되어 있지 않은 현지인 고용의무, 기술이전 의무, 현지 연구개발 의무 등도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않으면 부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선진기술의 전수, 고용 증진 등의 효과는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미국형 FTA는 요르단을 제외하면 '지적재산권'을 무역관련지적재산관(TRIPs) 이상의 수준으로 모두 개방하고 있지만, 개발도상국형의 남아프리카개발공동체를 제외하면 유럽연합형이나 개발도상국형, 기타까지 포함해도 어디에도 '지적재산권'을 TRIMs 이상의 높은 수준으로 개방한 경우는 없습니다.

 그리고 악명 높은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 미국형은 호주를 제외하면 모두가 채택됐지만, 유럽연합형은 하나도 채택이 안 됐고, 개발도상국형에서는 메르코수르와 카리콤을 제외하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유럽연합의 경우에는 양자투자협정에서는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을 채택하고 있지만요. 이 부분은 꽤나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라서 뒤에서 따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정리를 좀 해보자면, 미국형 FTA는 써비스 분야에서 '역진방지기제'를 통해 개방의 폐해가 일어나더라도 역행은 불가능하게 만들며, '주재의무부과금지'를 통해서 고용도 얼마나 늘어날지 장담할 수 없겠군요. 투자 분야에서는 '이행의무부과금지'를 통해서 외국인직접투자 효과가 줄어들 수 있고, '설립 전 단계 제한'이라는 것은 투기자본에 대해서도 산업진입을 허용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정부가 규제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줄이는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높으며, 투자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개방을 했지만, 외국인직접투자 효과가 얼마나 될지는 의문스럽다는 이야기지요. 


 미국형 FTA의 특징이 '비관세장벽', 그러니까 법과 제도를 바꾸는 데 있으며, 한미FTA 역시 그러한 미국형 FTA의 전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위에서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한미FTA가 한국의 법과 제도를 얼마나 바꿀까요?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게, 한미 FTA 때문에 우리 법령을 고쳐야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20개 법률을 고쳐야 한다고 하는데, 시행령 등까지 포함하면 고쳐야 할 게 훨씬 많겠지요. 행정부가 외국과의 조약 체결을 이유로 멀쩡하게 시행 중인 법령 20개를 고쳐야 한다고 얘기하는 게 과연 민주주의 원리상 맞는 것일까요? 법률을 고쳐야 한다면, 사전에 입법권자와 충분한 논의를 해야 합니다. 지금 하는 식대로라면 정부가 법률이 마음에 안 들면,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고치고 싶은 내용을 집어넣으면 될 겁니다. 이런 식이라면 국회가 왜 있나,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한미FTA 하나의 협정 엇갈린 '진실'> 289p~290p 중에서


 물론(?) 미국의 법은 하나도 바뀌지 않습니다. 이 자체는 한미FTA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과 미국 간의 '조약'이 가지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지만, 한미FTA 때문에 법률이 바뀌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절차적으로도 문제가 있고요. 물론 법이 바뀜에 따라 관련 제도도 바뀌겠지요. 


 그리고 '한미FTA가 앞으로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 것인가'하는 문제에서는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가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더 공부해야 할 부분이긴 하지만, 일단 위험성이 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네요.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이란 투자자가 투자국의 정부를 제3국의 국제기관에 직접 제소할 수 있는 절차를 의미합니다.우리나라가 이제까지 맺은 FTA에서도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은 있었지만, 미국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단순히 반미 감정에 기대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고,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습니다.


 한국이 지금까지 모든 FTA와 양자투자협정에서 투자자 대 정부분쟁해결 절차를 자신 있게 포함시킬 수 있었던 이면에는 실제로 상대국 투자자가 이 조항을 사용할 가능성을 높게 생각하지 않았던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상대는 미국이다. 지구상에서 인구 1인당 가장 변호사가 많은 미국이다. 조그만 것까지 꼬투리 잡아서 소송을 하는 미국 법률문화는 미국 내에서도 악명이 높다. 소송에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병원에서는 환자에게 온갖 불필요한 검사들을 다 요구하고, 의료보험료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급기야는 “미국이 가진 것은 변호사밖에 없는데, 그 잘난 변호사 때문에 병원에 가서 기다리다가 환자 죽게 생겼다”는 농담까지 나오는 미국이다. 부시 대통령까지 나서서 ‘시시콜콜한 소송(frivolous lawsuits)'을 줄이자고 나설 정도의 미국을 상대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FTA를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의 말처럼 ‘다국적 기업의 이윤추구행위를 방해하는 모든 법, 제도, 관행이 제소의 대상’이라는 소설에 불과한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협상에서 한국이 다른 아주 중요한 것을 얻어내기 위한 카드로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후략)…
 
                                                                                                                -<한미FTA 역전 시나리오>391p~392p 중에서

 
 마지막 문장처럼, 한미FTA 반대하는 사람들을 소설가 정도로 생각하는 분도-문제는 그 소설이 지구상의 어딘가에서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지만- 미국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있죠. 일단 우리가 미국 정부 상대로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을 이용해서 승소할 수 있을까요? 제가 알기로는 미국 정부는 한번도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에서 패소한 적이 없습니다. 그게 정말 미국 정부가 잘못한 게 없고, 다 합리적으로 잘 해서 그렇다고 한다면...글쎄요. 저도 구체적인 재판 내용들은 모르지만 과연 그럴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그렇다면 미국 기업이 우리나라 정부를 대상으로 이 제도를 사용해서 승소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물론 정확하게는 예상할 수는 없지만 절반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략)183개의 제소 건수가 있었지만 재판과정과 결과가 외부로 공표되지 않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어느 정도 승리했는지 알 수는 없다. 판정이 내려지고 외부로 알려진 41건의 소송 중 19건은 국가가 승리했다. 즉 국가의 승소율은 46% 정도인 것이다. 결코 높다고 할 수 없는 승소율이다.
 
                                                                                                                                   -<한국형 개방전략> 272p 중에서


한겨레 기사를 봐도 절반 정도의 확률로 승소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333971.html

 '나프타 출범 후 미국 기업이 제소하여 확정판결이 내려진 사건은 모두 11건인데, 미국 기업은 그중 5건 승소, 5건 패소하였으며, 1건은 사안의 일부에 대해서만 승소하였다.'(저 기사에 대해선 좀 생각을 해봐야 될 것 같은데, 일단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이 보편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순수하게 좋은지 나쁜지만 따져보도록 합시다.) 

 그러면 2건의 재판이 열리면 1번은 국가가 패소한다는, 그런 이야기가 되는데요. 배상액수도 적은 편은 아닙니다. 2004년 슬로바키아 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상업은행(SOB)과의 분쟁 시 8억 3,400만 달러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았는데, 이 액수는 그해 슬로바키아 재정적자의 1/3에 해당하는 액수였습니다. 이 경우는 배상액이 컸던 경우이고, 제소기업이 요구한 것보다 배상액이 더 적은 경우도 많았다고 하지만, 만만치 않은 액수인 것은 분명하죠.
 
 제가 보기에 정말 문제가 될만한 것은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 절차 때문에 실제로 중재기관에 회부돼서 패소를 당하지 않더라도, 정책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제약을 받을 수 있다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건 제가 정태인 씨께 질문을 드렸던 부분인데 이렇게 답변을 주시더군요.  
http://www.hadream.com/zb40pl3/zboard.php?id=peopl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933


 일단 투자자-국가제소권의 성격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특별히 한미 FTA가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상대방이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삼성이라도 미국에서 투자자 제소권을 사용하기는 그리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미국의 기업은 한국정부에 상당한 위협이 되고 실제로 한국의 관료들은 WTO 룰을 핑계로 정책을 회피하는 경우가 이미 많습니다. 예컨대 건강보험의 보장율을 80%로 올리는 정책은 AIG의 투자자제소권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 경우 우리 관료들은 아예 정책을 시행하지도 않겠죠. 움츠림효과 chiiling effect라는 겁니다.


 즉, 실제로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 절차가 사용되지 않더라도 국가정책을 실시하는 데 제약이 생길 수 있고, 이것이 '역진방지기제'와 맞물린다면 개방을 강화하는 정책만 실시할 수 있고, 개방에 역행하는 정책들은 실시할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한미FTA 찬성론자들은 '서비스 시장이 덜 개방돼서 아쉽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것을 보면 이들이 노리는 것이 정확히 그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점에서 '한미FTA는 앞으로 한국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결정짓는 한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한미FTA 말고도 몇 개의 분기점이 있겠지요. 하지만 외국과의 조약, 그것도 미국과의 조약을 통한 개방이라면 국내 반대세력을 잠재우고 개방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며,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이나 '역진방지기제'의 존재는 운신의 폭을 스스로 좁히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정부의 규제 권한을 스스로 내주고 나중에 개방의 폐해가 나타나더라도 되돌릴 수 없게 되는 방향으로 말이지요. 그런 점에서 한미FTA가 '파멸의 붉은새'일지는 모르겠지만, 한미FTA의 추진에 깔린 발상 자체는 아주 위험한 것이라고 봅니다. 


ps. 이거 쓴다고 꽤 힘들었습니다. 부족한 부분이야 많지만, 저도 경제학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데 이 정도 쓴다고 힘들었다는 점만은 이해해주세요.[...]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에 대해서는 제가 좀 더 공부를 하고 나중에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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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에 밀착해서 살아왔다. 역사는 목동의 피리소리에 맞추서 춤추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부상자의 신음소리와 싸움하는 소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