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는 사람이 돈이 필요해서 시장에 신장을 자유롭게 내놓고, 또 그 신장이 필요한 돈 많은 신장질환자가 자유롭게 사가도록 하면 어떻게 될까?

시장 원리상 이런 경우 양쪽 모두에게 거래의 이익이 발생한다. 신장이 필요한 돈 많은 부자는 신장을 사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돈이 필요한 돈 없는 사람은 신장을 팔아서 돈을 마련할 수 있고 또, 신장의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부터 순차적으로 양호한 신장이 공급되므로 자유시장·교환이 없을 때보다 신장제공자는 더 높은 가격, 제대로 된 가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시장에 대한 이러한 자유주의적(리버태리언) 가치는 세가지 측면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 신장제공자들은 과연 자유로운가? 대부분의 신장제공자들은 자신의 건강을 훼손해가면서까지 돈을 필요로 할 정도로 가난할 것이다. 이들의 제공행위는 그들의 절망적 가난 때문에 강제된 것으로서 자유로운 제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자유'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둘째, 자유시장 참여자들은 거래되는 목적물의 효용이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특히, 경제적으로 궁핍한 신장제공자들은 신장의 가치, 자기에게 신장이 하나 없어진다는 것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때 어느 한 쪽은 부당하게 손해를 받고 어느 한 쪽은 부당하게 이익을 챙긴다. 자유시장경제에 이러한 효용 판단에 착오가 있어서 어느 정도 부당 이익 또는 손해가 날 수도 있겠지만 신장매매의 경우 그 이익 손해가 너무 막대하며 되돌릴 수가 없다. 

부당 이익(손해)의 금지는 자유시장의 전제 조건이자 존재 이유다. 따라서 목적물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은 자유시장의 기본 전제, 존재 근거를 무너뜨린다. 

셋째, 신장을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없는 신장질환자는 어떻게 자신의 요구를 채울 수 있을까? 자유로운 시장에서 신장이 거래 교환된다면 신장에 일정한 높은 가격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 때 그 가격을 부담할 수 없는 가난한 신장질환자들은 어떻게 신장을 구할 수 있을까? 정부가 신장의 거래를 위한 자유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 이상 가난한 신장질환자들은 그저 죽을 시간을 기다려야 할 뿐이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서 특별한 예산을 투입해 가난한 신장질환자들 상당수를 구원해준다면 자유 시장은 이미 아닌 것이고 사회주의적 내지 사회국가주의적 수정 시장이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자유 시장에서 돈 없는 신장질환자는 죽어야 한다. 

마이클 샌델은 이 같은 자유주의(리버태리어니즘)의 모순때문에 시장에 도덕적 가치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한다. 즉 경제학과 시장이 객관성과 과학성을 확보하면서 효율성을 추구하며 도외시한 도덕적 가치에 대해서 경제학과 시장은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급기야 샌델은 "incentivise"라는 단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싶다고 까지 말한다. 인센티브, 유인이 없는 시장은 사실상 자유시장경제의 부정이다. 

마이클 샌델의 이러한 주장은 집단주의 내지 도덕적 공리주의에 입각한 주장이다. 그런데 마이클 센델이 공격한 것은 시장자유를 옹호하는 리버태리언 의 많은 분파 중에서 보수적 리버태리언에 속하는 비계약론적 자생적질서 자유주의(하이에크 주의)일 뿐이다. 리버태리언 중에는 진보적 리버태리언도 있다. 계약론적 평등론적 자유주의(롤즈 주의)이나 비계약론적 평등론적 자유주의(비르크 주의)등이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이다. 즉 샌델의 비판은 리버태리언 중 일부분에 한정된 것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마이클 샌델의 집단주의적, 도덕적 공리주의의 문제는 그가 추구한다는 행위의 준칙이 행복이나 '善( good)'이고 그것이 곧 정의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측정되느냐이다. 

이에 대해서 샌델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 효용을 기수적이 아닌 서수적(序數的)으로 측정할 뿐이라는 해명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시 개인들 사이에서 선에 대해서 어떻게 순서를 지울 것인가에 대해서 과연 샌델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샌델은 모든 개인이 선에 대한 가치가 똑 같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물론 집단주의자들은 모든 개인의 선에 대한 가치가 똑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집단주의의 개인에 대한 폭력이 아닌가? 

마이클 샌델의 집단주의적, 도덕적 공리주의의 또다른 근본적인 문제는 선이라는 것은 의도에 의해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기대하고 하는 목적적행위의 결과물인데, 이러한 가치관에 따라 善을 정한다거나 선(善)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있어서는 기수적으로 측정하든 서수적으로 측정하든 결과로 나타난 것을 대상으로 측정하는데 있어서 과연 인간의 행위의 계획으로 그 결과를 완전히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경험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허다하게 보아왔다. 신이 아닌 이상 행위의 결과를 완전히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동체는 장기기증을 자유시장에서 거래하는 것은 윤리도덕이나 공동체의 선, 정의관념에 위반된다고 하여 금지했다. 그리고 장기이식법을 제정했다. 결과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 장기기증자는 줄어들었으며 법제정 이전보다 두배이상 수천명의 환자들이 고통을 받고 죽어갔다. 행위의 결과는 예상한 것과는 반대로 나오는 경우는 허다하다. 샌델의 주장에 따랐지만 공동체 구성원의 도덕적 행위와 고결함에 근거한 기증행위가 이전보다 줄어들고, 더 많은사람들이 고통받게 된 것에 대해서 샌델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은 특수한 예외적인 경우를 가지고 보다 일반적인 보다 많은 경우의 선을 외면하는 것이다. 선(good)을 앞세우며 시장의 인센티브나 유인을 제한한다면 사회전체적인 효용은 떨어진다. 경제는 위축되고 그로 인해 그 사회 구성원들은 전보다 더 낮은 수준의 경제적 효용을 얻게된다. 그렇다면 이것도 과연 공동체의 선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샌델의 선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공동체의 경제적 효용을 제한할 수 있을까? 공동체의 경제적 효용증가는 공동체의 선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일까?

이상에서 샌델은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을 쳐내면서 시장 자유를 전적으로 추구하는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이 타당하지 않음을 밝혀냈지만 나는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의 입장에서 샌델의 집단주의적 도덕적 공리주의적 주장이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서 샌델의 사상과 이론체계가 타당하지 않음을 밝혀냈다. 

-우리 나라에서 샌델의 책 '정의론'이 수백만권 팔렸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좌파적 공동체주의 사상에 매우 호의적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 걸 감안해도 엄청 많이 팔린 것이다. 그런데 샌델의 사상과 이론체계에 대해서 제대로 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을 못봤다. 과연 수백만 명의 우리 나라 독자들은 샌델의 책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읽었을까?-

좌파적 공동체주의를 대표하는 샌델 사상과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것으로 많이 알려진)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 사상이 서로 서로 문제가 많음을 미봉해서 서로가 서로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낫다고 생각의 전개를 여기서 끝낼 수도 있겠지만, 니노 막시무스 쏘냐도르처럼 죽지 않고 남은 사상이 있다. 즉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이다.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은 기본적으로 자유 일원론적인 사상이다. 즉 자유를 가지고 평등의 문제와 공공 선의 문제를 해결한다.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은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과 같이 자유시장을 원칙적으로 하되 소수자 약자 혹은 최소수혜자의 자유를 높여서 평등과 공공의 선을 보완, 즉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의 문제점을 보완한다는 것이다. 이를 계약론적으로 전개할 수도 있고 비계약론적으로 전개할 수도 있다. 

일단 논의의 효용을 추구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공격에 보다 더 취약한 계약론적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 롤즈주의를 가지고 논증을 해보면, 계약론적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의 대표적인 사상인 롤즈 주의를 공격하는 유명한 사례가 있다. 즉 구명보트 모델(Lifeboat model)이라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구명보트 모델을 가지고 롤즈 주의를 폐기하고 있다. ( http://jonjayray.comuv.com/rawls.html )

구명보트 모델은 다음과 같다. "폭풍이 몰아치고 배가 가라앉는데 탑승인원에 비해 구명보트는 작아서 모두가 살아날 수 없는 상황이다. 롤즈적 리버태리어니즘에 입각해 가장 공정한(fair) 해법은 무엇일까? 롤즈 비판자들인 공동체주의자 내지 도덕적 공리주의자들은 딱 하나의 공정한 해법 밖에 없다고 한다. 배안의 모든 사람이 죽는 것밖에 없다고 한다. 구명보트 모델상에서 롤즈적 리버태리어니즘에 이러한 문제점이 있어서 롤즈의 아이디어를 폐기하게 되었다고 하고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있는데...

롤즈가 이미 죽은 마당에, 롤즈의 아이디어를 빌려 와서 처음부터 다시 논해보자, 과연 공리주의자들의 비판이 옳은지. 

공리주의의 선(善,正義)이론에서 공리주의자들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하는데 그에 따르면 일부 약자들을 희생하는 사회에서 최대행복을 추구할 경우 예를 들어 소수의 희생으로 노예제를 허용하여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우 등이 있다. 롤즈는 이것을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한 결과 계약론적 가설을 도입해서 직관주의에 따른 정의론을 주장한다.
 
구명보트 모델에 제시된 문제의 상황을 따져보기 전에 먼저, 포류하는 사람들간에는 특수관계(모자관계라든지 연인관계라든지 원수관계라든지)또는 특수상태 (어느 누가 정신박약자라든지 하는)가 없다고 가정하자. 문제된 상황에서 공리주의에 따르면 두가지 해법이 가능하다.
 
1. 가장 생존력이 높은 사람들 (예 : 건강이 양호한 성인 남자)을 살리고 생존가능성이 낮은 어린이, 노약자를 희생시켜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이다. 
 
2. 아니면 최대한 많은 수의 사람이 보트에 탈 수 있도록 가장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 순으로 1명씩 바다에 던지는 것이다. (어른 한명 희생해서 아이 두명 살리는 식으로) 이렇게 해서 최대한 다수의 행복을 추구한다. 
 
최대행복의 측면은 생환했다는 점에서는 행복의 크기는 모두가 같다고 보고, 최대다수의 행복이 곧 최대의 행복이 되기 때문에 따로 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공리주의를 따를 때 희생하는 사람의 경우 모든 사람에게는 평등한 자유가 있다는 롤즈의 사상에 따르면 희생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는 것이고 불공평해서 롤즈의 사상에 하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롤즈의 정의론 (정의의 두 원칙 : 원칙1. 평등우선, 원칙 2. 차등은 필요한 경우에만 차등. 전제조건 : 필요한 경우란 차등이 모든 사람의 처지를 개선해줄 때, 최소수혜자집단의 장기적 기대치를 극대화할 수 잇는 경우, 기회는 균등해야)에 따르면,
 
일단, 평등을 우선적용하되 필요한 경우에는 차등될 수 있도록 한다. 모든 사람의 생명은 평등하게 추구되어야 하지만 이렇게 되면 모두가 죽는다. 그러므로 롤스에 따르면 이 경우에는 차등대우가 필요한 경우이므로 차등대우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차등대우를 해보려고 하는데... 롤스에 따르면 차등대우는 최소수혜자의 장기적 기대치를 극대화시키거나 적어도 그에 기여할 경우 허용된다. 또 롤스는 차등은 모든 사람의 처지를 개선해줄 때 적용된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바다 위에서의 상황에서 차등대우는 한 사람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고 그가 생명을 잃는 순간 그는 처지가 개선될 여지가 없다. 모든 것이 끝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즉, 차등대우를 하려고 하지만 그 순간 차등대우 받는 당사자는 죽어버리므로 차등대우 받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처지를 개선해줄 때 차등대우를 적용한다는 것과 최소수혜자의 장기적 기대치를 극대화한다는 것이 논리적 모순이기에 애초부터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롤즈의 사상에 따르면 구명보트에서 탑승인원 초과된 상황에서는 차등의 대우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차등대우를 할 수 없게 되면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할 수 밖에 없는데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하려면 결국 모두가 죽어야하는 수 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공리주의자들은 롤스의 사상은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롤스의 정의론,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을 버렸다. 여기까지 공리주의자들의 논리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러나 이것은 애초에 롤즈가 전제한 것이 계약론적 가설이라는 점에서... 가설의 전제를 살펴볼 때, 롤즈의 정의론의 예외적인 경우로 봐야 할 것 같다.
 
롤즈의 이론을 적용함에 있어서 전제조건들에는, 여러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그 조건 가운데 "구성원들의 상충되는 제 요구에는 서열이 매겨져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그런데, 구명보트에 탑승인원 과다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구성원들의 요구에 서열이 매겨질 수 없다. 모두가 똑같이 소중한 자기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요구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롤즈의 정의론은 적용될 수 없다. 
 
이런 특수한 상황의 경우 롤즈의 정의론이 모순이라고 말할 것 까지는 안되고 그냥 예외적인 경우로서 공리주의가 적용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모든 구성원의 요구조건들이 완전히 똑같으니까 이 특수한 경우에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를 적용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런데 실제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자. 내가 위에서 샌델의 공리주의 이론을 비판했던 것 처럼 우리 사는 사회에서는 모든 구성원의 요구조건이나 선, 효용에 대한 가치판단 -기수적이든 서수적이든- 완전히 똑같다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다. 

그리고 또, 그리고 차등대우가 생명을 잃는 것처럼 차등을 허용할 때 장기적인 조정작용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는 상황은 극히 예외적인 것이다. 이렇게 아주 특수한 상황을 전제로 해놓고서 롤즈의 정의론은 타당하지 않다고 하면서 롤즈의 정의론을 버렸다고 말하는 공동체주의, 공리주의 철학자들은 현실감각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공동체주의 내지 공리주의보다는 롤즈의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이 더 타당하고 롤즈의 정의론이 여전히 존재가치를 가진다고 본다. 특히, 공리주의를 따를 때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희생되는 소수자나 약자의 입장에서 보면 공리주의만큼 나쁘고 가혹한 사상은 없다. 공리주의적 사고가 지배적인 나라, 특히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는 롤즈의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 이론, 즉 평등론적 자유주의 세계관을 좀 더 많이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 사상은 사민주의자들에게도 자본주의를 신뢰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인간의 모습을 한 자본주의로 수정된 자본주의를 요구할 때 유용한 철학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최소수혜자집단의 장기적 기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경우 차등, 즉 자본주의의 자유가 허용된다는 롤스의 철학은 사민주의나 수정자본주의를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할 것으로도 보인다. 


내가 지금 이러한 자유주의 이론에 대해서 갑자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지금의 우리 나라 상황이 일자리가 부족한 장기 저성장 사회로서 (http://on.fb.me/1dsCMcI) 독일의 하르쯔 같은 자유주의적 개혁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오래전 부터 직감했기 때문이다. 

갑오년을 맞이해서 (http://on.fb.me/1dfhbkA) 이 같은 개혁이 본격화 되기를 희망하고 있는데 우려되는 점은 자유주의적 개혁, 즉 리버태리언적 개혁으로 공공성을 추구할 때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과 대립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진보로 알려진 야권은 샌델의 공동체주의 내지 공리주의적 사상에 근거해 자유주의적 개혁을 부정할 것이 예상되고 또 우리 사회의 새로운 보수로 알려진 여권의 하이에크적 자유주의자들은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의 그 많은 문제와 한계점을 무시하고 시장 자유와 효율성 일변도로 강공 드라이브를 펼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들을 우려하며 사람 사는 세상의 모든 사상은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다는 것을 한 사람의 리버태리언으로서 알리고 싶다. 현실을 직시해서 모자라면 보태고 넘치면 제하시라. 

그리고 친노 민주당은 제발...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좀 알아차리고 자유주의적 공공성을 어떻게 적절히 받아들일 것인지 고민 좀 하시고... 

* 참조 : 마이클 샌델의 칼럼 '만약 내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면' (http://bit.ly/1hhb5aw

ps : 리버태리어니즘이 집단보다 개인을 더 우선시 하기 때문에 공공의 선을 도모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좌파나 진보들의 생각인데 이에 대한 반론을 제대로 설명해달라는 길벗님의 요청은 나중에 시간 있을 때 들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