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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는 사람이 돈이 필요해서 시장에 신장을 자유롭게 내놓고, 또 그 신장이 필요한 돈 많은 신장질환자가 자유롭게 사가도록 하면 어떻게 될까?
시장 원리상 이런 경우 양쪽 모두에게 거래의 이익이 발생한다. 신장이 필요한 돈 많은 부자는 신장을 사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돈이 필요한 돈 없는 사람은 신장을 팔아서 돈을 마련할 수 있고 또, 신장의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부터 순차적으로 양호한 신장이 공급되므로 자유시장·교환이 없을 때보다 신장제공자는 더 높은 가격, 제대로 된 가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시장에 대한 이러한 자유주의적(리버태리언) 가치는 세가지 측면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 신장제공자들은 과연 자유로운가? 대부분의 신장제공자들은 자신의 건강을 훼손해가면서까지 돈을 필요로 할 정도로 가난할 것이다. 이들의 제공행위는 그들의 절망적 가난 때문에 강제된 것으로서 자유로운 제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자유'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둘째, 자유시장 참여자들은 거래되는 목적물의 효용이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특히, 경제적으로 궁핍한 신장제공자들은 신장의 가치, 자기에게 신장이 하나 없어진다는 것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때 어느 한 쪽은 부당하게 손해를 받고 어느 한 쪽은 부당하게 이익을 챙긴다. 자유시장경제에 이러한 효용 판단에 착오가 있어서 어느 정도 부당 이익 또는 손해가 날 수도 있겠지만 신장매매의 경우 그 이익 손해가 너무 막대하며 되돌릴 수가 없다.
부당 이익(손해)의 금지는 자유시장의 전제 조건이자 존재 이유다. 따라서 목적물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은 자유시장의 기본 전제, 존재 근거를 무너뜨린다.
셋째, 신장을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없는 신장질환자는 어떻게 자신의 요구를 채울 수 있을까? 자유로운 시장에서 신장이 거래 교환된다면 신장에 일정한 높은 가격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 때 그 가격을 부담할 수 없는 가난한 신장질환자들은 어떻게 신장을 구할 수 있을까? 정부가 신장의 거래를 위한 자유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 이상 가난한 신장질환자들은 그저 죽을 시간을 기다려야 할 뿐이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서 특별한 예산을 투입해 가난한 신장질환자들 상당수를 구원해준다면 자유 시장은 이미 아닌 것이고 사회주의적 내지 사회국가주의적 수정 시장이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자유 시장에서 돈 없는 신장질환자는 죽어야 한다.
마이클 샌델은 이 같은 자유주의(리버태리어니즘)의 모순때문에 시장에 도덕적 가치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한다. 즉 경제학과 시장이 객관성과 과학성을 확보하면서 효율성을 추구하며 도외시한 도덕적 가치에 대해서 경제학과 시장은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급기야 샌델은 "incentivise"라는 단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싶다고 까지 말한다. 인센티브, 유인이 없는 시장은 사실상 자유시장경제의 부정이다.
마이클 샌델의 이러한 주장은 집단주의 내지 도덕적 공리주의에 입각한 주장이다. 그런데 마이클 센델이 공격한 것은 시장자유를 옹호하는 리버태리언 의 많은 분파 중에서 보수적 리버태리언에 속하는 비계약론적 자생적질서 자유주의(하이에크 주의)일 뿐이다. 리버태리언 중에는 진보적 리버태리언도 있다. 계약론적 평등론적 자유주의(롤즈 주의)이나 비계약론적 평등론적 자유주의(비르크 주의)등이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이다. 즉 샌델의 비판은 리버태리언 중 일부분에 한정된 것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마이클 샌델의 집단주의적, 도덕적 공리주의의 문제는 그가 추구한다는 행위의 준칙이 행복이나 '善( good)'이고 그것이 곧 정의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측정되느냐이다.
이에 대해서 샌델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 효용을 기수적이 아닌 서수적(序數的)으로 측정할 뿐이라는 해명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시 개인들 사이에서 선에 대해서 어떻게 순서를 지울 것인가에 대해서 과연 샌델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샌델은 모든 개인이 선에 대한 가치가 똑 같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물론 집단주의자들은 모든 개인의 선에 대한 가치가 똑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집단주의의 개인에 대한 폭력이 아닌가?
마이클 샌델의 집단주의적, 도덕적 공리주의의 또다른 근본적인 문제는 선이라는 것은 의도에 의해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기대하고 하는 목적적행위의 결과물인데, 이러한 가치관에 따라 善을 정한다거나 선(善)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있어서는 기수적으로 측정하든 서수적으로 측정하든 결과로 나타난 것을 대상으로 측정하는데 있어서 과연 인간의 행위의 계획으로 그 결과를 완전히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경험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허다하게 보아왔다. 신이 아닌 이상 행위의 결과를 완전히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동체는 장기기증을 자유시장에서 거래하는 것은 윤리도덕이나 공동체의 선, 정의관념에 위반된다고 하여 금지했다. 그리고 장기이식법을 제정했다. 결과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 장기기증자는 줄어들었으며 법제정 이전보다 두배이상 수천명의 환자들이 고통을 받고 죽어갔다. 행위의 결과는 예상한 것과는 반대로 나오는 경우는 허다하다. 샌델의 주장에 따랐지만 공동체 구성원의 도덕적 행위와 고결함에 근거한 기증행위가 이전보다 줄어들고, 더 많은사람들이 고통받게 된 것에 대해서 샌델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은 특수한 예외적인 경우를 가지고 보다 일반적인 보다 많은 경우의 선을 외면하는 것이다. 선(good)을 앞세우며 시장의 인센티브나 유인을 제한한다면 사회전체적인 효용은 떨어진다. 경제는 위축되고 그로 인해 그 사회 구성원들은 전보다 더 낮은 수준의 경제적 효용을 얻게된다. 그렇다면 이것도 과연 공동체의 선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샌델의 선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공동체의 경제적 효용을 제한할 수 있을까? 공동체의 경제적 효용증가는 공동체의 선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일까?
이상에서 샌델은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을 쳐내면서 시장 자유를 전적으로 추구하는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이 타당하지 않음을 밝혀냈지만 나는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의 입장에서 샌델의 집단주의적 도덕적 공리주의적 주장이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서 샌델의 사상과 이론체계가 타당하지 않음을 밝혀냈다.
-우리 나라에서 샌델의 책 '정의론'이 수백만권 팔렸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좌파적 공동체주의 사상에 매우 호의적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 걸 감안해도 엄청 많이 팔린 것이다. 그런데 샌델의 사상과 이론체계에 대해서 제대로 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을 못봤다. 과연 수백만 명의 우리 나라 독자들은 샌델의 책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읽었을까?-
좌파적 공동체주의를 대표하는 샌델 사상과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것으로 많이 알려진)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 사상이 서로 서로 문제가 많음을 미봉해서 서로가 서로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낫다고 생각의 전개를 여기서 끝낼 수도 있겠지만, 니노 막시무스 쏘냐도르처럼 죽지 않고 남은 사상이 있다. 즉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이다.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은 기본적으로 자유 일원론적인 사상이다. 즉 자유를 가지고 평등의 문제와 공공 선의 문제를 해결한다.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은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과 같이 자유시장을 원칙적으로 하되 소수자 약자 혹은 최소수혜자의 자유를 높여서 평등과 공공의 선을 보완, 즉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의 문제점을 보완한다는 것이다. 이를 계약론적으로 전개할 수도 있고 비계약론적으로 전개할 수도 있다.
일단 논의의 효용을 추구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공격에 보다 더 취약한 계약론적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 롤즈주의를 가지고 논증을 해보면, 계약론적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의 대표적인 사상인 롤즈 주의를 공격하는 유명한 사례가 있다. 즉 구명보트 모델(Lifeboat model)이라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구명보트 모델을 가지고 롤즈 주의를 폐기하고 있다. ( http://jonjayray.comuv.com/rawls.html )
구명보트 모델은 다음과 같다. "폭풍이 몰아치고 배가 가라앉는데 탑승인원에 비해 구명보트는 작아서 모두가 살아날 수 없는 상황이다. 롤즈적 리버태리어니즘에 입각해 가장 공정한(fair) 해법은 무엇일까? 롤즈 비판자들인 공동체주의자 내지 도덕적 공리주의자들은 딱 하나의 공정한 해법 밖에 없다고 한다. 배안의 모든 사람이 죽는 것밖에 없다고 한다. 구명보트 모델상에서 롤즈적 리버태리어니즘에 이러한 문제점이 있어서 롤즈의 아이디어를 폐기하게 되었다고 하고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있는데...
롤즈가 이미 죽은 마당에, 롤즈의 아이디어를 빌려 와서 처음부터 다시 논해보자, 과연 공리주의자들의 비판이 옳은지.
공리주의의 선(善,正義)이론에서 공리주의자들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하는데 그에 따르면 일부 약자들을 희생하는 사회에서 최대행복을 추구할 경우 예를 들어 소수의 희생으로 노예제를 허용하여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우 등이 있다. 롤즈는 이것을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한 결과 계약론적 가설을 도입해서 직관주의에 따른 정의론을 주장한다.
구명보트 모델에 제시된 문제의 상황을 따져보기 전에 먼저, 포류하는 사람들간에는 특수관계(모자관계라든지 연인관계라든지 원수관계라든지)또는 특수상태 (어느 누가 정신박약자라든지 하는)가 없다고 가정하자. 문제된 상황에서 공리주의에 따르면 두가지 해법이 가능하다.
1. 가장 생존력이 높은 사람들 (예 : 건강이 양호한 성인 남자)을 살리고 생존가능성이 낮은 어린이, 노약자를 희생시켜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이다.
2. 아니면 최대한 많은 수의 사람이 보트에 탈 수 있도록 가장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 순으로 1명씩 바다에 던지는 것이다. (어른 한명 희생해서 아이 두명 살리는 식으로) 이렇게 해서 최대한 다수의 행복을 추구한다.
최대행복의 측면은 생환했다는 점에서는 행복의 크기는 모두가 같다고 보고, 최대다수의 행복이 곧 최대의 행복이 되기 때문에 따로 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공리주의를 따를 때 희생하는 사람의 경우 모든 사람에게는 평등한 자유가 있다는 롤즈의 사상에 따르면 희생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는 것이고 불공평해서 롤즈의 사상에 하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롤즈의 정의론 (정의의 두 원칙 : 원칙1. 평등우선, 원칙 2. 차등은 필요한 경우에만 차등. 전제조건 : 필요한 경우란 차등이 모든 사람의 처지를 개선해줄 때, 최소수혜자집단의 장기적 기대치를 극대화할 수 잇는 경우, 기회는 균등해야)에 따르면,
일단, 평등을 우선적용하되 필요한 경우에는 차등될 수 있도록 한다. 모든 사람의 생명은 평등하게 추구되어야 하지만 이렇게 되면 모두가 죽는다. 그러므로 롤스에 따르면 이 경우에는 차등대우가 필요한 경우이므로 차등대우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차등대우를 해보려고 하는데... 롤스에 따르면 차등대우는 최소수혜자의 장기적 기대치를 극대화시키거나 적어도 그에 기여할 경우 허용된다. 또 롤스는 차등은 모든 사람의 처지를 개선해줄 때 적용된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바다 위에서의 상황에서 차등대우는 한 사람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고 그가 생명을 잃는 순간 그는 처지가 개선될 여지가 없다. 모든 것이 끝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즉, 차등대우를 하려고 하지만 그 순간 차등대우 받는 당사자는 죽어버리므로 차등대우 받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처지를 개선해줄 때 차등대우를 적용한다는 것과 최소수혜자의 장기적 기대치를 극대화한다는 것이 논리적 모순이기에 애초부터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롤즈의 사상에 따르면 구명보트에서 탑승인원 초과된 상황에서는 차등의 대우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차등대우를 할 수 없게 되면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할 수 밖에 없는데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하려면 결국 모두가 죽어야하는 수 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공리주의자들은 롤스의 사상은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롤스의 정의론,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을 버렸다. 여기까지 공리주의자들의 논리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러나 이것은 애초에 롤즈가 전제한 것이 계약론적 가설이라는 점에서... 가설의 전제를 살펴볼 때, 롤즈의 정의론의 예외적인 경우로 봐야 할 것 같다.
롤즈의 이론을 적용함에 있어서 전제조건들에는, 여러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그 조건 가운데 "구성원들의 상충되는 제 요구에는 서열이 매겨져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그런데, 구명보트에 탑승인원 과다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구성원들의 요구에 서열이 매겨질 수 없다. 모두가 똑같이 소중한 자기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요구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롤즈의 정의론은 적용될 수 없다.
이런 특수한 상황의 경우 롤즈의 정의론이 모순이라고 말할 것 까지는 안되고 그냥 예외적인 경우로서 공리주의가 적용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모든 구성원의 요구조건들이 완전히 똑같으니까 이 특수한 경우에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를 적용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런데 실제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자. 내가 위에서 샌델의 공리주의 이론을 비판했던 것 처럼 우리 사는 사회에서는 모든 구성원의 요구조건이나 선, 효용에 대한 가치판단 -기수적이든 서수적이든- 완전히 똑같다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다.
그리고 또, 그리고 차등대우가 생명을 잃는 것처럼 차등을 허용할 때 장기적인 조정작용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는 상황은 극히 예외적인 것이다. 이렇게 아주 특수한 상황을 전제로 해놓고서 롤즈의 정의론은 타당하지 않다고 하면서 롤즈의 정의론을 버렸다고 말하는 공동체주의, 공리주의 철학자들은 현실감각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공동체주의 내지 공리주의보다는 롤즈의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이 더 타당하고 롤즈의 정의론이 여전히 존재가치를 가진다고 본다. 특히, 공리주의를 따를 때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희생되는 소수자나 약자의 입장에서 보면 공리주의만큼 나쁘고 가혹한 사상은 없다. 공리주의적 사고가 지배적인 나라, 특히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는 롤즈의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 이론, 즉 평등론적 자유주의 세계관을 좀 더 많이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 사상은 사민주의자들에게도 자본주의를 신뢰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인간의 모습을 한 자본주의로 수정된 자본주의를 요구할 때 유용한 철학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최소수혜자집단의 장기적 기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경우 차등, 즉 자본주의의 자유가 허용된다는 롤스의 철학은 사민주의나 수정자본주의를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할 것으로도 보인다.
내가 지금 이러한 자유주의 이론에 대해서 갑자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지금의 우리 나라 상황이 일자리가 부족한 장기 저성장 사회로서 (http://on.fb.me/1dsCMcI) 독일의 하르쯔 같은 자유주의적 개혁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오래전 부터 직감했기 때문이다.
갑오년을 맞이해서 (http://on.fb.me/1dfhbkA) 이 같은 개혁이 본격화 되기를 희망하고 있는데 우려되는 점은 자유주의적 개혁, 즉 리버태리언적 개혁으로 공공성을 추구할 때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과 대립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진보로 알려진 야권은 샌델의 공동체주의 내지 공리주의적 사상에 근거해 자유주의적 개혁을 부정할 것이 예상되고 또 우리 사회의 새로운 보수로 알려진 여권의 하이에크적 자유주의자들은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의 그 많은 문제와 한계점을 무시하고 시장 자유와 효율성 일변도로 강공 드라이브를 펼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들을 우려하며 사람 사는 세상의 모든 사상은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다는 것을 한 사람의 리버태리언으로서 알리고 싶다. 현실을 직시해서 모자라면 보태고 넘치면 제하시라.
그리고 친노 민주당은 제발...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좀 알아차리고 자유주의적 공공성을 어떻게 적절히 받아들일 것인지 고민 좀 하시고...
* 참조 : 마이클 샌델의 칼럼 '만약 내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면' (http://bit.ly/1hhb5aw)
ps : 리버태리어니즘이 집단보다 개인을 더 우선시 하기 때문에 공공의 선을 도모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좌파나 진보들의 생각인데 이에 대한 반론을 제대로 설명해달라는 길벗님의 요청은 나중에 시간 있을 때 들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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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원리상 이런 경우 양쪽 모두에게 거래의 이익이 발생한다. 신장이 필요한 돈 많은 부자는 신장을 사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돈이 필요한 돈 없는 사람은 신장을 팔아서 돈을 마련할 수 있고 또, 신장의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부터 순차적으로 양호한 신장이 공급되므로 자유시장·교환이 없을 때보다 신장제공자는 더 높은 가격, 제대로 된 가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시장에 대한 이러한 자유주의적(리버태리언) 가치는 세가지 측면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첫째, 신장제공자들은 과연 자유로운가? 대부분의 신장제공자들은 자신의 건강을 훼손해가면서까지 돈을 필요로 할 정도로 가난할 것이다. 이들의 제공행위는 그들의 절망적 가난 때문에 강제된 것으로서 자유로운 제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자유'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둘째, 자유시장 참여자들은 거래되는 목적물의 효용이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특히, 경제적으로 궁핍한 신장제공자들은 신장의 가치, 자기에게 신장이 하나 없어진다는 것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때 어느 한 쪽은 부당하게 손해를 받고 어느 한 쪽은 부당하게 이익을 챙긴다. 자유시장경제에 이러한 효용 판단에 착오가 있어서 어느 정도 부당 이익 또는 손해가 날 수도 있겠지만 신장매매의 경우 그 이익 손해가 너무 막대하며 되돌릴 수가 없다.
부당 이익(손해)의 금지는 자유시장의 전제 조건이자 존재 이유다. 따라서 목적물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은 자유시장의 기본 전제, 존재 근거를 무너뜨린다.
셋째, 신장을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없는 신장질환자는 어떻게 자신의 요구를 채울 수 있을까? 자유로운 시장에서 신장이 거래 교환된다면 신장에 일정한 높은 가격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 때 그 가격을 부담할 수 없는 가난한 신장질환자들은 어떻게 신장을 구할 수 있을까? 정부가 신장의 거래를 위한 자유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 이상 가난한 신장질환자들은 그저 죽을 시간을 기다려야 할 뿐이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서 특별한 예산을 투입해 가난한 신장질환자들 상당수를 구원해준다면 자유 시장은 이미 아닌 것이고 사회주의적 내지 사회국가주의적 수정 시장이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자유 시장에서 돈 없는 신장질환자는 죽어야 한다.
마이클 샌델은 이 같은 자유주의(리버태리어니즘)의 모순때문에 시장에 도덕적 가치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한다. 즉 경제학과 시장이 객관성과 과학성을 확보하면서 효율성을 추구하며 도외시한 도덕적 가치에 대해서 경제학과 시장은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급기야 샌델은 "incentivise"라는 단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싶다고 까지 말한다. 인센티브, 유인이 없는 시장은 사실상 자유시장경제의 부정이다.
마이클 샌델의 이러한 주장은 집단주의 내지 도덕적 공리주의에 입각한 주장이다. 그런데 마이클 센델이 공격한 것은 시장자유를 옹호하는 리버태리언 의 많은 분파 중에서 보수적 리버태리언에 속하는 비계약론적 자생적질서 자유주의(하이에크 주의)일 뿐이다. 리버태리언 중에는 진보적 리버태리언도 있다. 계약론적 평등론적 자유주의(롤즈 주의)이나 비계약론적 평등론적 자유주의(비르크 주의)등이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이다. 즉 샌델의 비판은 리버태리언 중 일부분에 한정된 것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마이클 샌델의 집단주의적, 도덕적 공리주의의 문제는 그가 추구한다는 행위의 준칙이 행복이나 '善( good)'이고 그것이 곧 정의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측정되느냐이다.
이에 대해서 샌델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 효용을 기수적이 아닌 서수적(序數的)으로 측정할 뿐이라는 해명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시 개인들 사이에서 선에 대해서 어떻게 순서를 지울 것인가에 대해서 과연 샌델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샌델은 모든 개인이 선에 대한 가치가 똑 같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물론 집단주의자들은 모든 개인의 선에 대한 가치가 똑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집단주의의 개인에 대한 폭력이 아닌가?
마이클 샌델의 집단주의적, 도덕적 공리주의의 또다른 근본적인 문제는 선이라는 것은 의도에 의해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기대하고 하는 목적적행위의 결과물인데, 이러한 가치관에 따라 善을 정한다거나 선(善)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있어서는 기수적으로 측정하든 서수적으로 측정하든 결과로 나타난 것을 대상으로 측정하는데 있어서 과연 인간의 행위의 계획으로 그 결과를 완전히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경험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허다하게 보아왔다. 신이 아닌 이상 행위의 결과를 완전히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동체는 장기기증을 자유시장에서 거래하는 것은 윤리도덕이나 공동체의 선, 정의관념에 위반된다고 하여 금지했다. 그리고 장기이식법을 제정했다. 결과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 장기기증자는 줄어들었으며 법제정 이전보다 두배이상 수천명의 환자들이 고통을 받고 죽어갔다. 행위의 결과는 예상한 것과는 반대로 나오는 경우는 허다하다. 샌델의 주장에 따랐지만 공동체 구성원의 도덕적 행위와 고결함에 근거한 기증행위가 이전보다 줄어들고, 더 많은사람들이 고통받게 된 것에 대해서 샌델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은 특수한 예외적인 경우를 가지고 보다 일반적인 보다 많은 경우의 선을 외면하는 것이다. 선(good)을 앞세우며 시장의 인센티브나 유인을 제한한다면 사회전체적인 효용은 떨어진다. 경제는 위축되고 그로 인해 그 사회 구성원들은 전보다 더 낮은 수준의 경제적 효용을 얻게된다. 그렇다면 이것도 과연 공동체의 선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샌델의 선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공동체의 경제적 효용을 제한할 수 있을까? 공동체의 경제적 효용증가는 공동체의 선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일까?
이상에서 샌델은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을 쳐내면서 시장 자유를 전적으로 추구하는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이 타당하지 않음을 밝혀냈지만 나는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의 입장에서 샌델의 집단주의적 도덕적 공리주의적 주장이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서 샌델의 사상과 이론체계가 타당하지 않음을 밝혀냈다.
-우리 나라에서 샌델의 책 '정의론'이 수백만권 팔렸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좌파적 공동체주의 사상에 매우 호의적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 걸 감안해도 엄청 많이 팔린 것이다. 그런데 샌델의 사상과 이론체계에 대해서 제대로 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을 못봤다. 과연 수백만 명의 우리 나라 독자들은 샌델의 책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읽었을까?-
좌파적 공동체주의를 대표하는 샌델 사상과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것으로 많이 알려진)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 사상이 서로 서로 문제가 많음을 미봉해서 서로가 서로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낫다고 생각의 전개를 여기서 끝낼 수도 있겠지만, 니노 막시무스 쏘냐도르처럼 죽지 않고 남은 사상이 있다. 즉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이다.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은 기본적으로 자유 일원론적인 사상이다. 즉 자유를 가지고 평등의 문제와 공공 선의 문제를 해결한다.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은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과 같이 자유시장을 원칙적으로 하되 소수자 약자 혹은 최소수혜자의 자유를 높여서 평등과 공공의 선을 보완, 즉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의 문제점을 보완한다는 것이다. 이를 계약론적으로 전개할 수도 있고 비계약론적으로 전개할 수도 있다.
일단 논의의 효용을 추구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공격에 보다 더 취약한 계약론적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 롤즈주의를 가지고 논증을 해보면, 계약론적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의 대표적인 사상인 롤즈 주의를 공격하는 유명한 사례가 있다. 즉 구명보트 모델(Lifeboat model)이라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구명보트 모델을 가지고 롤즈 주의를 폐기하고 있다. ( http://jonjayray.comuv.com/rawls.html )
구명보트 모델은 다음과 같다. "폭풍이 몰아치고 배가 가라앉는데 탑승인원에 비해 구명보트는 작아서 모두가 살아날 수 없는 상황이다. 롤즈적 리버태리어니즘에 입각해 가장 공정한(fair) 해법은 무엇일까? 롤즈 비판자들인 공동체주의자 내지 도덕적 공리주의자들은 딱 하나의 공정한 해법 밖에 없다고 한다. 배안의 모든 사람이 죽는 것밖에 없다고 한다. 구명보트 모델상에서 롤즈적 리버태리어니즘에 이러한 문제점이 있어서 롤즈의 아이디어를 폐기하게 되었다고 하고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있는데...
롤즈가 이미 죽은 마당에, 롤즈의 아이디어를 빌려 와서 처음부터 다시 논해보자, 과연 공리주의자들의 비판이 옳은지.
공리주의의 선(善,正義)이론에서 공리주의자들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하는데 그에 따르면 일부 약자들을 희생하는 사회에서 최대행복을 추구할 경우 예를 들어 소수의 희생으로 노예제를 허용하여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우 등이 있다. 롤즈는 이것을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한 결과 계약론적 가설을 도입해서 직관주의에 따른 정의론을 주장한다.
구명보트 모델에 제시된 문제의 상황을 따져보기 전에 먼저, 포류하는 사람들간에는 특수관계(모자관계라든지 연인관계라든지 원수관계라든지)또는 특수상태 (어느 누가 정신박약자라든지 하는)가 없다고 가정하자. 문제된 상황에서 공리주의에 따르면 두가지 해법이 가능하다.
1. 가장 생존력이 높은 사람들 (예 : 건강이 양호한 성인 남자)을 살리고 생존가능성이 낮은 어린이, 노약자를 희생시켜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이다.
2. 아니면 최대한 많은 수의 사람이 보트에 탈 수 있도록 가장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 순으로 1명씩 바다에 던지는 것이다. (어른 한명 희생해서 아이 두명 살리는 식으로) 이렇게 해서 최대한 다수의 행복을 추구한다.
최대행복의 측면은 생환했다는 점에서는 행복의 크기는 모두가 같다고 보고, 최대다수의 행복이 곧 최대의 행복이 되기 때문에 따로 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공리주의를 따를 때 희생하는 사람의 경우 모든 사람에게는 평등한 자유가 있다는 롤즈의 사상에 따르면 희생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는 것이고 불공평해서 롤즈의 사상에 하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롤즈의 정의론 (정의의 두 원칙 : 원칙1. 평등우선, 원칙 2. 차등은 필요한 경우에만 차등. 전제조건 : 필요한 경우란 차등이 모든 사람의 처지를 개선해줄 때, 최소수혜자집단의 장기적 기대치를 극대화할 수 잇는 경우, 기회는 균등해야)에 따르면,
일단, 평등을 우선적용하되 필요한 경우에는 차등될 수 있도록 한다. 모든 사람의 생명은 평등하게 추구되어야 하지만 이렇게 되면 모두가 죽는다. 그러므로 롤스에 따르면 이 경우에는 차등대우가 필요한 경우이므로 차등대우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차등대우를 해보려고 하는데... 롤스에 따르면 차등대우는 최소수혜자의 장기적 기대치를 극대화시키거나 적어도 그에 기여할 경우 허용된다. 또 롤스는 차등은 모든 사람의 처지를 개선해줄 때 적용된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바다 위에서의 상황에서 차등대우는 한 사람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고 그가 생명을 잃는 순간 그는 처지가 개선될 여지가 없다. 모든 것이 끝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즉, 차등대우를 하려고 하지만 그 순간 차등대우 받는 당사자는 죽어버리므로 차등대우 받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처지를 개선해줄 때 차등대우를 적용한다는 것과 최소수혜자의 장기적 기대치를 극대화한다는 것이 논리적 모순이기에 애초부터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롤즈의 사상에 따르면 구명보트에서 탑승인원 초과된 상황에서는 차등의 대우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차등대우를 할 수 없게 되면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할 수 밖에 없는데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하려면 결국 모두가 죽어야하는 수 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공리주의자들은 롤스의 사상은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롤스의 정의론,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을 버렸다. 여기까지 공리주의자들의 논리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러나 이것은 애초에 롤즈가 전제한 것이 계약론적 가설이라는 점에서... 가설의 전제를 살펴볼 때, 롤즈의 정의론의 예외적인 경우로 봐야 할 것 같다.
롤즈의 이론을 적용함에 있어서 전제조건들에는, 여러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그 조건 가운데 "구성원들의 상충되는 제 요구에는 서열이 매겨져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그런데, 구명보트에 탑승인원 과다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구성원들의 요구에 서열이 매겨질 수 없다. 모두가 똑같이 소중한 자기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요구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롤즈의 정의론은 적용될 수 없다.
이런 특수한 상황의 경우 롤즈의 정의론이 모순이라고 말할 것 까지는 안되고 그냥 예외적인 경우로서 공리주의가 적용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모든 구성원의 요구조건들이 완전히 똑같으니까 이 특수한 경우에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를 적용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런데 실제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자. 내가 위에서 샌델의 공리주의 이론을 비판했던 것 처럼 우리 사는 사회에서는 모든 구성원의 요구조건이나 선, 효용에 대한 가치판단 -기수적이든 서수적이든- 완전히 똑같다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다.
그리고 또, 그리고 차등대우가 생명을 잃는 것처럼 차등을 허용할 때 장기적인 조정작용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는 상황은 극히 예외적인 것이다. 이렇게 아주 특수한 상황을 전제로 해놓고서 롤즈의 정의론은 타당하지 않다고 하면서 롤즈의 정의론을 버렸다고 말하는 공동체주의, 공리주의 철학자들은 현실감각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공동체주의 내지 공리주의보다는 롤즈의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이 더 타당하고 롤즈의 정의론이 여전히 존재가치를 가진다고 본다. 특히, 공리주의를 따를 때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희생되는 소수자나 약자의 입장에서 보면 공리주의만큼 나쁘고 가혹한 사상은 없다. 공리주의적 사고가 지배적인 나라, 특히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는 롤즈의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 이론, 즉 평등론적 자유주의 세계관을 좀 더 많이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 사상은 사민주의자들에게도 자본주의를 신뢰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인간의 모습을 한 자본주의로 수정된 자본주의를 요구할 때 유용한 철학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최소수혜자집단의 장기적 기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경우 차등, 즉 자본주의의 자유가 허용된다는 롤스의 철학은 사민주의나 수정자본주의를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할 것으로도 보인다.
내가 지금 이러한 자유주의 이론에 대해서 갑자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지금의 우리 나라 상황이 일자리가 부족한 장기 저성장 사회로서 (http://on.fb.me/1dsCMcI) 독일의 하르쯔 같은 자유주의적 개혁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오래전 부터 직감했기 때문이다.
갑오년을 맞이해서 (http://on.fb.me/1dfhbkA) 이 같은 개혁이 본격화 되기를 희망하고 있는데 우려되는 점은 자유주의적 개혁, 즉 리버태리언적 개혁으로 공공성을 추구할 때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과 대립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진보로 알려진 야권은 샌델의 공동체주의 내지 공리주의적 사상에 근거해 자유주의적 개혁을 부정할 것이 예상되고 또 우리 사회의 새로운 보수로 알려진 여권의 하이에크적 자유주의자들은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의 그 많은 문제와 한계점을 무시하고 시장 자유와 효율성 일변도로 강공 드라이브를 펼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들을 우려하며 사람 사는 세상의 모든 사상은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다는 것을 한 사람의 리버태리언으로서 알리고 싶다. 현실을 직시해서 모자라면 보태고 넘치면 제하시라.
그리고 친노 민주당은 제발...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좀 알아차리고 자유주의적 공공성을 어떻게 적절히 받아들일 것인지 고민 좀 하시고...
* 참조 : 마이클 샌델의 칼럼 '만약 내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면' (http://bit.ly/1hhb5aw)
ps : 리버태리어니즘이 집단보다 개인을 더 우선시 하기 때문에 공공의 선을 도모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좌파나 진보들의 생각인데 이에 대한 반론을 제대로 설명해달라는 길벗님의 요청은 나중에 시간 있을 때 들어드리겠습니다.
2014.01.03 16:52:17
논리를 반박할때 특수한 예로 보편을 부정하거나 부분으로 전체를 부정하는 것
예외를 일반적으로 주장하면서 틀렸다 하는건 망청이들이지요
반박은 보편 타당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가지고 해야지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이론 자체를 부정하는건 멍청이들
그리고 모든 이론이나 주장은 불완전하다는 것
그리고 시대와 문화 환경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걸 알아야지요
따라서. 지금 우리의 삶에 가장 합리적인 대안이 뭐냐로 논쟁을 가져가야지요
2014.01.03 16:59:54
롤즈라면 사후 장기 몰수, 재산 몰수(=상속세 부과)에 찬성할 겁니다. 샌델은 말할 나위도 없을 테고...
바로 이 점이 롤즈가 노직에게 까이는 소이이죠.
바로 이 점이 롤즈가 노직에게 까이는 소이이죠.
2014.01.03 17:07:51
잘 읽었습니다. 저 역시 공동체주의에는 상당한 반감이 드는걸 보니 자유주의자 다 된 모양입니다.
공공선에 대한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합의가 우선이고, 합의해주지 않는 사람에게 공공선을 강요하는건 그 사회의 존망이 걸리지 않은 이상 최후의 방법이 되어야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떤 공동체의 범죄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건 정작 공동체주의자들이 아니라 자유주의자라는 아이러니한 사실이 있죠. 가령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해 공동체주의자들은 생까고, 사죄를 말하는 사람들은 자유주의자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장의 인센티브'가 무슨 의미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시장참여는 그 자체로 이익 아닌가요?
공공선에 대한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합의가 우선이고, 합의해주지 않는 사람에게 공공선을 강요하는건 그 사회의 존망이 걸리지 않은 이상 최후의 방법이 되어야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떤 공동체의 범죄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건 정작 공동체주의자들이 아니라 자유주의자라는 아이러니한 사실이 있죠. 가령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해 공동체주의자들은 생까고, 사죄를 말하는 사람들은 자유주의자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장의 인센티브'가 무슨 의미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시장참여는 그 자체로 이익 아닌가요?
2014.01.04 00:34:50
전 님이 '공리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비판하면서 사회의 경제적 효용 얘기를 꺼내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결국 사회 전체의 경제적 효용을 최대화하는 것이 선의 일종이라는 것도 도덕적 공리주의를 근저에 깔고 있는 말이 아닌가 하는 것이죠.
예컨대 급진적인 시각에서 질문한다면 왜 사회의 경제적 효용을 증진시켜야 되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겁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각 개인이 적당히 만족하는 수준의 사회적 에퀼리브리움이 '사회'를 물신화해서 설정한 '사회의 경제적 효용'과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부터 궁금한데 하나 여쭙고 싶습니다.
보통 liberalism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 자유주의라 할 텐데 굳이 libertarianism을 자유주의라 하는 이유는 무엇이죠?
이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시던데 이 기회에 말씀 좀 듣고 싶습니다.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liberalism이나 libertarianism은 분명히 함의가 다른 내용이라고 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본래 libertarianism이라는 것은 아나키즘과 관련이 깊은 용어입니다. 좌파 아나키즘과 우파 아나키즘 모두에서.
그런데 님은 그런 함의는 싹 빼고 자유주의=libertarianism을 등치시키고 계십니다.
그런데 님은 그런 함의는 싹 빼고 자유주의=libertarianism을 등치시키고 계십니다.
2014.01.04 07:28:23
디즈레일리 / 1. 공리주의를 비판할 때 정의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며 모든 것을 쾌락 또는 효용의 문제로 치환한다는 비판이 제기됩니다. 이에 대해서 쾌락, 효용 대신에 善으로 대체하자는 입장이 있습니다 프롬이나 샌델이 그런 입장이고 이를 도덕적 공리주의라고 부르는 것으로 압니다. (여기에도 도덕적공리주의 좌파, 도덕적공리주의 우파가 있습니다) 善, good을 가지고 오면서 사회전체의 경제적 효용만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선으로 (일부 혹은 전부) 대체하자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사회전체의 경제적 효용만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사회전체의 경제적 효용이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어떤 입장이 좋은지는 각자의 가치관이나 사회의 칸센서스가 결정할 일이지 철학적으로는 무엇이 옳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선이라는 게 각자마다 다른데 이걸 어떻게 똑 같은 하나의 가치기준을 가지고 선이라고 정할 수 있느냐에대해서 도덕적 공리주의가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집단의 저마다 다른 개인에 대한 억압이 발생한다는 거죠. 공리주의라는 공동체주의적, 집단주의적 가치관은 전체주의, 전제주의, 독재주의, 국가주의, 파시즘 등으로 흐르기 쉽상이죠. 이론적으로는 그렇다는 겁니다. 이러한 전체주의, 전제주의, 독재주의, 국가주의, 파시즘에 가장 크게 저항하는 가치관이 리버태리어니즘입니다.
2. 미국에서는 리버럴리즘을 그냥 리버럴리즘이라고 하고 리버태리어니즘을 리버태리어니즘이라고 하니까 번역의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을 도입하면서 좌파들이 장악하고 있는 한국의 지식 사상계가 리버럴리즘을 자유주의라고 번역하고 리버태리어니즘을 자유지상주의라고 번역을 합니다. (http://bit.ly/1hmZF51)
국내에서 리버태리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번역에 대해서 매우 잘못됐다고 주장합니다. 일단 자유지상주의라고 하면 자유가 무조건 옳고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인상을 준다고 봅니다. 또 리버럴리즘이 블런델 고스초크 모델에서 보듯이 개인적영역 내지 사회문화적 영역에서는 자유라는 가치를 본원적 원리로 삼고 추구하지만 집단적영역 내지 경제적영역에서는 자유라는 가치를 본원적으로 삼지 않고 공리적입장에서 자유를 부정합니다. 이에 비해 리버태리어니즘은 개인적영역 내지 사회문화적 영역에서도 자유라는 가치를 추구하고 집단적영역 내지 경제적영역에서도 자유라는 가치를 추구합니다. 그렇다면 리버럴리즘이라는 것이 불완전한 자유주의이고 리버태리어니즘을 그냥 자유주의 혹은 온전한자유주의라고 해야할 것인데 한국에서는 리버럴리즘이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차지하고 있고리버태리어니즘이 자유지상주의라는 이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국내의 리버태리언들은 리버럴리즘을 불완전자유주의, 리버태리어니즘을 자유주의 혹은 진짜 자유주의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김완진 송현호 등이 쓴 자유주의의 기원과 분류에 관한 책을 보시면 리버럴에 대해서는 아예 소개가 없습니다. 리버럴을 자유주의로 보지 않고 공리주의의 일종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리버럴과 공리주의, 리버태리언의 사상적 기원을 봐도 리버럴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공리주의 계열입니다. 즉 리버럴과 공리주의는 대륙계 카르테시안 합리주의 전통을 따른 것이고 리버태리언은 영미계 스코틀랜드 경험주의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다만 리버태리언 사상이 국내에 일반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학자들은 소수입니다. 최근에 민경국 교수, 경제진화연구회 등에서 리버태리언 사상을 주창하고 있는데 이 단체는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 하이에크주의(언론 대중들이 말하는 신자유주의)에 매우 경도돼 있습니다.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을 리버태리언으로 취급하지 않고 리버럴 혹은 좌파 혹은 아나키스트로 취급을 하죠.
그리고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자유주의 혹은 리버태리어니즘은 광의,협의,최협의의 의미에서 각각 다르게 사용합니다. 한겨레신문의 정치경제스탠스 분류표를 보시면 리버태리언(자유주의자)을 오쏘리태리언(권위주의자)에 대척적인 입장으로 구성하고 리버태리어니즘 안에 리버럴리즘과 리버태리어니즘(협의의 리버태리어니즘)을 모두 넣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리버럴에도 자유주의라고 할 만한 것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자유주의 요소가 약간은 들어있기 때문에 리버럴을 자유주의 안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광의의 리버태리언, 리버태리어니즘이죠. 최협의의 리버태리언,리버태리어니즘은 비계약론적 자생적질서론적 리버태리어니즘, 소위 하이에크주의라고 불리는 리버태리어니즘입니다.
아무튼 국내에 리버태리언은 극소수이고 진보적리버태리언은 극의 극소수입니다. 리버태리언과 거리가 있는, 좌파적, 공동체주의적 성향이 강한 한국의 지식사상계가 다수의 힘으로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지식 사상계는 그런 식으로, 리버태리어니즘은 악인 것처럼 취급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크로의 많은 분들도 그런 입장에 동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미미한 일 개인일 뿐인 저로서는 그런 공동체주의적 억압적 취급에 대해 제대로 저항할 수가 없고 다만 리버태리어니즘을 그렇게 보지 마라는 글을 쓰면서 국내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영향을 주는 리버태리언들이 보수적리버태리언 일색으로 구성되는 것을 우려할 뿐입니다.
디즈레일리님이 따로 쓰신 본문 글에는 별다른 논평을 하지 않겠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한마디 드리자면 "이론과 모델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는 것. 샌델의 글을 굳이 샌델의 입장에서 해석할 필요는 없죠. 샌델이 주장한다고 해서 리버태리어니즘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어떤 입장이 좋은지는 각자의 가치관이나 사회의 칸센서스가 결정할 일이지 철학적으로는 무엇이 옳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선이라는 게 각자마다 다른데 이걸 어떻게 똑 같은 하나의 가치기준을 가지고 선이라고 정할 수 있느냐에대해서 도덕적 공리주의가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집단의 저마다 다른 개인에 대한 억압이 발생한다는 거죠. 공리주의라는 공동체주의적, 집단주의적 가치관은 전체주의, 전제주의, 독재주의, 국가주의, 파시즘 등으로 흐르기 쉽상이죠. 이론적으로는 그렇다는 겁니다. 이러한 전체주의, 전제주의, 독재주의, 국가주의, 파시즘에 가장 크게 저항하는 가치관이 리버태리어니즘입니다.
2. 미국에서는 리버럴리즘을 그냥 리버럴리즘이라고 하고 리버태리어니즘을 리버태리어니즘이라고 하니까 번역의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을 도입하면서 좌파들이 장악하고 있는 한국의 지식 사상계가 리버럴리즘을 자유주의라고 번역하고 리버태리어니즘을 자유지상주의라고 번역을 합니다. (http://bit.ly/1hmZF51)
국내에서 리버태리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번역에 대해서 매우 잘못됐다고 주장합니다. 일단 자유지상주의라고 하면 자유가 무조건 옳고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인상을 준다고 봅니다. 또 리버럴리즘이 블런델 고스초크 모델에서 보듯이 개인적영역 내지 사회문화적 영역에서는 자유라는 가치를 본원적 원리로 삼고 추구하지만 집단적영역 내지 경제적영역에서는 자유라는 가치를 본원적으로 삼지 않고 공리적입장에서 자유를 부정합니다. 이에 비해 리버태리어니즘은 개인적영역 내지 사회문화적 영역에서도 자유라는 가치를 추구하고 집단적영역 내지 경제적영역에서도 자유라는 가치를 추구합니다. 그렇다면 리버럴리즘이라는 것이 불완전한 자유주의이고 리버태리어니즘을 그냥 자유주의 혹은 온전한자유주의라고 해야할 것인데 한국에서는 리버럴리즘이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차지하고 있고리버태리어니즘이 자유지상주의라는 이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국내의 리버태리언들은 리버럴리즘을 불완전자유주의, 리버태리어니즘을 자유주의 혹은 진짜 자유주의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김완진 송현호 등이 쓴 자유주의의 기원과 분류에 관한 책을 보시면 리버럴에 대해서는 아예 소개가 없습니다. 리버럴을 자유주의로 보지 않고 공리주의의 일종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리버럴과 공리주의, 리버태리언의 사상적 기원을 봐도 리버럴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공리주의 계열입니다. 즉 리버럴과 공리주의는 대륙계 카르테시안 합리주의 전통을 따른 것이고 리버태리언은 영미계 스코틀랜드 경험주의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다만 리버태리언 사상이 국내에 일반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학자들은 소수입니다. 최근에 민경국 교수, 경제진화연구회 등에서 리버태리언 사상을 주창하고 있는데 이 단체는 보수적 리버태리어니즘, 하이에크주의(언론 대중들이 말하는 신자유주의)에 매우 경도돼 있습니다. 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을 리버태리언으로 취급하지 않고 리버럴 혹은 좌파 혹은 아나키스트로 취급을 하죠.
그리고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자유주의 혹은 리버태리어니즘은 광의,협의,최협의의 의미에서 각각 다르게 사용합니다. 한겨레신문의 정치경제스탠스 분류표를 보시면 리버태리언(자유주의자)을 오쏘리태리언(권위주의자)에 대척적인 입장으로 구성하고 리버태리어니즘 안에 리버럴리즘과 리버태리어니즘(협의의 리버태리어니즘)을 모두 넣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리버럴에도 자유주의라고 할 만한 것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자유주의 요소가 약간은 들어있기 때문에 리버럴을 자유주의 안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광의의 리버태리언, 리버태리어니즘이죠. 최협의의 리버태리언,리버태리어니즘은 비계약론적 자생적질서론적 리버태리어니즘, 소위 하이에크주의라고 불리는 리버태리어니즘입니다.
아무튼 국내에 리버태리언은 극소수이고 진보적리버태리언은 극의 극소수입니다. 리버태리언과 거리가 있는, 좌파적, 공동체주의적 성향이 강한 한국의 지식사상계가 다수의 힘으로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지식 사상계는 그런 식으로, 리버태리어니즘은 악인 것처럼 취급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크로의 많은 분들도 그런 입장에 동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미미한 일 개인일 뿐인 저로서는 그런 공동체주의적 억압적 취급에 대해 제대로 저항할 수가 없고 다만 리버태리어니즘을 그렇게 보지 마라는 글을 쓰면서 국내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영향을 주는 리버태리언들이 보수적리버태리언 일색으로 구성되는 것을 우려할 뿐입니다.
디즈레일리님이 따로 쓰신 본문 글에는 별다른 논평을 하지 않겠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한마디 드리자면 "이론과 모델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는 것. 샌델의 글을 굳이 샌델의 입장에서 해석할 필요는 없죠. 샌델이 주장한다고 해서 리버태리어니즘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2014.01.04 10:13:32
차칸노르 님, 디즈레일리 님의 차칸노르 님 글에 대한 분석과 비판에서 핵심 사항 하나는 차칸노르 님이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의 「If I ruled the world」를 애초에 오독했다는 것입니다.
차칸노르님의 샌델 독해에 대한 문제제기. ― 디즈레일리
[번역] 내가 세계를 통치한다면 (마이클 샌델) ― 칼도
즉 마이클 샌델의 주장/논리/견해가 과연 옳으냐 그르냐, 설득력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문제를 따지기 전에, 마이클 샌델의 요지를 객관적으로 정확히 파악하고 비판을 하더라도 하라는, 이런 얘기라는 거예요.
즉 초장부터 남의 글을 오독한 사람이 어떻게 제대로 된/올바른 논의를 펼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자기식으로 아전인수 해놓고 뭐라 왈가왈부하면 말짱 헛소리라는 얘깁니다. 내 생각에 디즈레일리 님의 비판의 핵심은 이겁니다.
그런데 차칸노르 님은 자기자신의 오독, 다시 말해 독해 오류, 즉 마이클 샌델에 대한 원천적 오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습니다. 즉 차칸노르 님 자신의 논지 전개에 결정적으로 불리한 사항에 대해서는 고의적으로 피해가거나 꿀먹은 벙어리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논의/논쟁이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논쟁 당사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오류에 대해서 즉각 자인/시인/인정하고 수정하는 자세를 보여야 합니다.
내가 판단컨대, 논쟁 과정에서 차칸노르 님은 가장 중요한 덕목을 빼먹고 있습니다.
차칸노르님의 샌델 독해에 대한 문제제기. ― 디즈레일리
[번역] 내가 세계를 통치한다면 (마이클 샌델) ― 칼도
즉 마이클 샌델의 주장/논리/견해가 과연 옳으냐 그르냐, 설득력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문제를 따지기 전에, 마이클 샌델의 요지를 객관적으로 정확히 파악하고 비판을 하더라도 하라는, 이런 얘기라는 거예요.
즉 초장부터 남의 글을 오독한 사람이 어떻게 제대로 된/올바른 논의를 펼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자기식으로 아전인수 해놓고 뭐라 왈가왈부하면 말짱 헛소리라는 얘깁니다. 내 생각에 디즈레일리 님의 비판의 핵심은 이겁니다.
그런데 차칸노르 님은 자기자신의 오독, 다시 말해 독해 오류, 즉 마이클 샌델에 대한 원천적 오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습니다. 즉 차칸노르 님 자신의 논지 전개에 결정적으로 불리한 사항에 대해서는 고의적으로 피해가거나 꿀먹은 벙어리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논의/논쟁이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논쟁 당사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오류에 대해서 즉각 자인/시인/인정하고 수정하는 자세를 보여야 합니다.
내가 판단컨대, 논쟁 과정에서 차칸노르 님은 가장 중요한 덕목을 빼먹고 있습니다.
2014.01.04 11:37:23
qualia / 님은 참 폭력적이시네요. 저는 샌델의 글을 읽고 샌델의 생각과 다른 제 생각을 말한 것 뿐입니다. 샌델을 그대로 따를 필요가 뭐가 있나요? 다르게 생각하면 오독입니까? 님은 상대방의 존재를 아예 부정하고 있습니다. 공리주의적 집단주의적 사고로 다르다는 것을 악으로 간주하는... 상대방을 부정하면서 무슨 토론을 운운하십니까?
디즈레일리님이 주장하시는 게 이것같은데...
나는 내가 세계를 통치한다면 이 관행들을 금지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나는 더 큰 목표를 염두에 두고 있다: 경제적 논리가 공공의 심성에, 그리고 우리의 도덕적 및 정치적 상상력에 행사하는 장악력을 느슨하게 하기. (중략) 경제학 교과서를 개정하는 한편, 나는 온건한 법령 하나를 공포할 것이다: 나는 정치학자들, 은행가들, 기업 중역들, 그리고 정책 분석가들의 용어들 중 하나로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흉물스러운 새 동사 하나 - “인센티바이즈” - 의 사용을 금지할 것이다. 이 동사를 금지하는 것은 우리가 공공선을 추구하는 예전의, 덜 경제학적인 방식들 - 심의, 논증, 설득 - 을 회복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이것을 제가 이렇게 해석했지요.
마이클 샌델은 이 같은 자유주의(리버태리어니즘)의 모순때문에 시장에 도덕적 가치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한다. 즉 경제학과 시장이 객관성과 과학성을 확보하면서 효율성을 추구하며 도외시한 도덕적 가치에 대해서 경제학과 시장은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급기야 샌델은 "incentivise"라는 단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싶다고 까지 말한다. 인센티브, 유인이 없는 시장은 사실상 자유시장경제의 부정이다.
샌델이 신장매매의 사례를 통해서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모순을 지적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샌델의 사상은 집단주의에 기반하는 도덕적 공리주의입니다. 그러한 사상에 따라 자유주의적 경제논리의 사회에 대한 장악력을 줄이고 그 대신 도덕적이고 공리적 가치를 가지고 사회를 움직이게 하겠다는 것이 샌델의 생각입니다. 이 해석이 틀렸습니까?
저는 샌델이 생각하는 共利나 善,good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다른 이해 관계 가지고 있기 때문에-이것이 자유주의 사상에서 말하는 '인간의 이중적 지위'라는 겁니다. 총체적으로 볼 때는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모두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에서 모두 같지만 구체적으로 볼 때는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있어서 모두 다르다는 뜻입니다. )
설령 그 공리라는 것을 "공리는 무엇이다" 라고 정하더라도 그 양도 순서도 정할 수도 없고 그것을 정해서 사회나 경제에 도입하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경제적 효율성이 떨어지면서 무엇보다도 집단주의적 억압과 폭력이 나온다고 본 것입니다. 지금 콸리아님이 저한테 저지르시는 것처럼 그런 억압과 폭력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절충적인 태도(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가 바람직하다는 글을 썼습니다.
샌델은 자유주의 경제논리의 사회에 대한 장악력을 줄이고 공공선을 추구하는 덜 경제적인 방식을 회복함으로써 모순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인센티바이즈의 사용을 금지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맞죠? 여기서 인센티바이즈의 사용을 금지한다는 게 뭡니까? 샌델은 돈을 지급함으로써 효율을 높이는 것의 몇가지 거북한 사례를 소개하면서 자기가 전세계를 통치하게 되면 전세계적으로 인센티바이즈의 사용을 금지하겠다고 했는데... 앞서 설명드렸듯이 샌델은 기본적으로 집단주의자이고 도덕적공리주의자입니다. 사회 전반에 미치는 이론을 이야기 하고 있고요. 그것을 몇가지 사례, 마약중독여성에게 돈을 주는 댓가로 피임을 실시한다. 그래서 그 여성의 아기가 버려지는 것을 막겠다는 방침 등등을 통해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센티바이즈를 금지하면 그러한 몇가지 사례에 대한 인센티바이즈의 사용만 금지됩니까? 샌델이 그런 경우에만 인센티바이즈를 금지하자고 했습니까? 설령 샌델이 다시 부연하고 나와서 그런 경우에만 인센티바이즈를 금지하겠다고 해도 인센티바이즈에 대해서 불온하게 보는 사상이 다른 경우에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됩니까?
인센티바이즈의 사용을 금지하면 어떻게 됩니까? 인센티바이즈는 자유시장 모순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자유시장의 효율을 높이는 가장 기본적인 시스템이고 자유시장 그 자체입니다. 앞선 신장매매의 사례에서와 같이 신장제공자에게는 돈을 줌으로써, 즉 시장 자유에 맡겨서 그런 교환이 더 잘 일어나도록 하는 것도 인센티바이즈입니다. 그게 보기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면 그냥 그 목적물에 한정해서, 신장만 자유롭게 거래할 수 없도록 하면 되는 것이지 인센티바이즈까지 금지할 필요가 도대체 뭡니까?
자유주의자들은 사람 들은 자기 이익 (self interest)에 따라 행동한다고 봅니다. -집단주의자들은self interest를 '이기심'으로 곡해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이기심으로 해석하는 것은 부당하죠. 이기심이라는 단어에는 부정적인 느낌이 들어있으니까요.-
각자의 self interest는 서로 교환될 때 가장 잘, 효올적으로, 가장 많이 챙길 수 있습니다. self interes를 위한 인센티브를 마련해 주고 그 인센티브가 가장 잘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유시장시스템입니다. 인센티브가 잘 발휘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게 뭡니까? 인센티바이즈 아닙니까? 그런 인센티바이즈를 금지한다는 게 뭡니까? 사실상 자유시장시스템의 부정 아닙니까?
디즈레일리님이 주장하시는 게 이것같은데...
나는 내가 세계를 통치한다면 이 관행들을 금지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나는 더 큰 목표를 염두에 두고 있다: 경제적 논리가 공공의 심성에, 그리고 우리의 도덕적 및 정치적 상상력에 행사하는 장악력을 느슨하게 하기. (중략) 경제학 교과서를 개정하는 한편, 나는 온건한 법령 하나를 공포할 것이다: 나는 정치학자들, 은행가들, 기업 중역들, 그리고 정책 분석가들의 용어들 중 하나로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흉물스러운 새 동사 하나 - “인센티바이즈” - 의 사용을 금지할 것이다. 이 동사를 금지하는 것은 우리가 공공선을 추구하는 예전의, 덜 경제학적인 방식들 - 심의, 논증, 설득 - 을 회복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이것을 제가 이렇게 해석했지요.
마이클 샌델은 이 같은 자유주의(리버태리어니즘)의 모순때문에 시장에 도덕적 가치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한다. 즉 경제학과 시장이 객관성과 과학성을 확보하면서 효율성을 추구하며 도외시한 도덕적 가치에 대해서 경제학과 시장은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급기야 샌델은 "incentivise"라는 단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싶다고 까지 말한다. 인센티브, 유인이 없는 시장은 사실상 자유시장경제의 부정이다.
샌델이 신장매매의 사례를 통해서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모순을 지적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샌델의 사상은 집단주의에 기반하는 도덕적 공리주의입니다. 그러한 사상에 따라 자유주의적 경제논리의 사회에 대한 장악력을 줄이고 그 대신 도덕적이고 공리적 가치를 가지고 사회를 움직이게 하겠다는 것이 샌델의 생각입니다. 이 해석이 틀렸습니까?
저는 샌델이 생각하는 共利나 善,good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다른 이해 관계 가지고 있기 때문에-이것이 자유주의 사상에서 말하는 '인간의 이중적 지위'라는 겁니다. 총체적으로 볼 때는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모두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에서 모두 같지만 구체적으로 볼 때는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있어서 모두 다르다는 뜻입니다. )
설령 그 공리라는 것을 "공리는 무엇이다" 라고 정하더라도 그 양도 순서도 정할 수도 없고 그것을 정해서 사회나 경제에 도입하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경제적 효율성이 떨어지면서 무엇보다도 집단주의적 억압과 폭력이 나온다고 본 것입니다. 지금 콸리아님이 저한테 저지르시는 것처럼 그런 억압과 폭력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절충적인 태도(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가 바람직하다는 글을 썼습니다.
샌델은 자유주의 경제논리의 사회에 대한 장악력을 줄이고 공공선을 추구하는 덜 경제적인 방식을 회복함으로써 모순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인센티바이즈의 사용을 금지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맞죠? 여기서 인센티바이즈의 사용을 금지한다는 게 뭡니까? 샌델은 돈을 지급함으로써 효율을 높이는 것의 몇가지 거북한 사례를 소개하면서 자기가 전세계를 통치하게 되면 전세계적으로 인센티바이즈의 사용을 금지하겠다고 했는데... 앞서 설명드렸듯이 샌델은 기본적으로 집단주의자이고 도덕적공리주의자입니다. 사회 전반에 미치는 이론을 이야기 하고 있고요. 그것을 몇가지 사례, 마약중독여성에게 돈을 주는 댓가로 피임을 실시한다. 그래서 그 여성의 아기가 버려지는 것을 막겠다는 방침 등등을 통해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센티바이즈를 금지하면 그러한 몇가지 사례에 대한 인센티바이즈의 사용만 금지됩니까? 샌델이 그런 경우에만 인센티바이즈를 금지하자고 했습니까? 설령 샌델이 다시 부연하고 나와서 그런 경우에만 인센티바이즈를 금지하겠다고 해도 인센티바이즈에 대해서 불온하게 보는 사상이 다른 경우에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됩니까?
인센티바이즈의 사용을 금지하면 어떻게 됩니까? 인센티바이즈는 자유시장 모순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자유시장의 효율을 높이는 가장 기본적인 시스템이고 자유시장 그 자체입니다. 앞선 신장매매의 사례에서와 같이 신장제공자에게는 돈을 줌으로써, 즉 시장 자유에 맡겨서 그런 교환이 더 잘 일어나도록 하는 것도 인센티바이즈입니다. 그게 보기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면 그냥 그 목적물에 한정해서, 신장만 자유롭게 거래할 수 없도록 하면 되는 것이지 인센티바이즈까지 금지할 필요가 도대체 뭡니까?
자유주의자들은 사람 들은 자기 이익 (self interest)에 따라 행동한다고 봅니다. -집단주의자들은self interest를 '이기심'으로 곡해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이기심으로 해석하는 것은 부당하죠. 이기심이라는 단어에는 부정적인 느낌이 들어있으니까요.-
각자의 self interest는 서로 교환될 때 가장 잘, 효올적으로, 가장 많이 챙길 수 있습니다. self interes를 위한 인센티브를 마련해 주고 그 인센티브가 가장 잘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유시장시스템입니다. 인센티브가 잘 발휘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게 뭡니까? 인센티바이즈 아닙니까? 그런 인센티바이즈를 금지한다는 게 뭡니까? 사실상 자유시장시스템의 부정 아닙니까?
2014.01.04 12:27:23
디즈레일리 / 샌델은 인센티바이즈 단어를 금지하자고 했습니다. 샌델은 현금 인센티브 등 시장 인센티브를 주는 것 대신에 심의,논증,설득을 통해서 자유경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사회공동의 선을 도모하자고 했는데... 심의,논증,설득. 그리고 선(善) 등등이 '도덕적인 측면에서는' 인센티브가 될 수도 있겠죠. 결국엔 이것은 시장에서는 자유시장의 인센티브 시스템에 대한 개입 내지 훼손인 것이고 제한적인 인센티브 시스템이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리버태리어니즘적인 시장이 아닙니다. 사회주의 내지 사민주의적 시장이 돼버리는 겁니다.
2014.01.04 15:16:43
디즈레일리 / 1.정치와 경제는 밀접합니다. 샌델이 인센티바이즈를 금지한다고 할때 문맥상 분명히 금전적 인센티바이즈를 금지한다고 했죠. 경제영역에 대한 제한입니다. 그런데 그 금지를 경제에서 합니까? 정치, 정책에서 하는 거죠.
2. 자유경제시상이 효율성에 있어서 사회주의나 사민주의 계획경제시장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증명됐죠. 이게 경제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으로 논리연결을 할 수 있느냐는 정치적 사상적 문제이고... 다만 샌델처럼 공리주의자 도덕주의자 혼자서 우리 공리주의자들이 원하는대로 하자고 하는 식이면 곤란하죠. 샌델이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자유주의자들과 딜을 해서 교환하던가 딜할 것이 없거나 불가능하면 칸센서스 과정을 통해서 결정하든가...
저는 처음부터 절충하고 자유주의 경제를 원칙으로 하고 그 모순에 대해서만 부분적으로 적절히 제한과 개혁을 해나가자는 입장이었고요.
2. 자유경제시상이 효율성에 있어서 사회주의나 사민주의 계획경제시장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증명됐죠. 이게 경제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으로 논리연결을 할 수 있느냐는 정치적 사상적 문제이고... 다만 샌델처럼 공리주의자 도덕주의자 혼자서 우리 공리주의자들이 원하는대로 하자고 하는 식이면 곤란하죠. 샌델이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자유주의자들과 딜을 해서 교환하던가 딜할 것이 없거나 불가능하면 칸센서스 과정을 통해서 결정하든가...
저는 처음부터 절충하고 자유주의 경제를 원칙으로 하고 그 모순에 대해서만 부분적으로 적절히 제한과 개혁을 해나가자는 입장이었고요.
2014.01.04 15:24:18
차칸노르/ 님과 동의할 수 이ㅆ는 지점과 어ㅂㅅ는 지점이 점점 분명해지는 듯합니다. 2에 대해서만 추가 코멘트하겠습니다.
자유경제시장이 사회주의나 사민주의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겅험적으로 확인된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전세게 경제성장률이 평균적으로 제일 높았던 1945-1965 정도의 기간에 미국과 유럽 저ㅇ부들은 말만 자유시장이지 사실상 사민주의에 가까운 경제정책을 펼쳤습니다. 누진세율도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저ㅇ도로 노ㅍ았고요.
더구나 지금 세게 겅제 위기 소ㄱ에서도 비교적 안정을 유지하는 나라들은 완전자유시장보다는 혼합경제나 사민주의에 가까운 나라드링 많습니다.
당장 대한민국도 완전자유시장이라 하긴 어렵죠. 독일도 마찬가지고 스칸디나비아도 마찬가집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덧붙이자면 경험적으로 증명된 건 딱 하나.
공산주의, 혹은 동구권이라고도 할. 있는 지역의 특수한 고ㅇ산주의 경제 실험은 자본주의 혼합경제에 비해서 열등한 것으로 드러나긴 햌씁니다.
그렇다 해서 그게 자유시장이 사회주의 혹은 사민주의조다 우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에 동의를 못하신다면 전 이제 여기서 서로 agree to disagree하는 게 나은 것 같습니다
2014.01.04 12:14:35
차킨노르/ 일단 응답래 주셔서 가ㅁ사합니다.
근데 말이죠. 리버럴리즘은 경제영역에서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부터 확실히 하시죠.
이사야 벌린이라는 철학자가 일전에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구분한 적이 이ㅆ는데
소극적 자유는 간섭받지 않을 자유, 적극적 자유는 자신이 원하는 걸 이룰 능력을 가진 자유입니다.
리버테리언은 말하자면 소극적 자유에 보다 겨ㅇ도도,어 이ㅆ고 리버럴은 겨ㅇ제영역에서는 적극적 자유를 추구하는 입장입니다.
여기서 적극적 지유란 건 보다 사회적 야ㄱ자의 자유에 초점을 맞춘 거ㅅ이김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자유라는 가치를 소극적 자유로만 한정시킨 리버테리어니즘도 완전한 자유주의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제가 따로 글을 쓰ㄴ 거ㅅ은 새ㄴ델의 입장에서 샌델의 글을 해석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님이 전에 저더러 니ㅁ의 그ㄹ을 곡해해서 비난한다는 비판을 주신 적이 이ㅆ으신데,
어쨌든 남의 글을 이ㄹㄱ을 때에도 본래 의미에 추ㅇ실하게 독해한 뒤에 그것을 다시 재해석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거ㅅ이었죠.
님의 입장을 확인하였으니 더 할 마ㄹ은 어ㅂ씁니다.
2014.01.04 12:32:14
디즈레일리 / 리버럴은 경제 영역에서 국가의 개입, 간섭, 규제를 옹호합니다. 리버태리언은 개입, 간섭, 규제을 가급적 반대하고 자유롭게 시장질서에 맡겨둘 것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구분해서 리버럴이 경제영역에서 자유를 제한하면서 국가의 개입, 규제를 옹호하는 행위를 두고 "적극적 자유라는 것도 있으니 리버럴은 경제 영역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라고 하면 제게는 말장난 처럼 들립니다.
리버럴이 적극적 자유 개념을 통해서 경제 영역의 자유를 제한하고 규제간섭개입하는 것은 리버럴들이 정치영역에서 자유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소수자 약자의 적극적 자유를 위해서 사회의 소수자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경제에서 자유를 제한하는 거지요. 정치와 경제는 밀접하게 결합돼 있지만 그것을 구분하셔야 합니다.
ps: 국내에서 진보, 리버럴들이 소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론을 만들어 낸 이사야 벌린을 비난하고 있다는 것은 아시나요? 이사야 벌린을 "공공의 적"으로 간주하더군요. 이사야 벌린이 적극적 자유라는 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라고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논리의 일관성이 없습니다.
리버럴이 적극적 자유 개념을 통해서 경제 영역의 자유를 제한하고 규제간섭개입하는 것은 리버럴들이 정치영역에서 자유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소수자 약자의 적극적 자유를 위해서 사회의 소수자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경제에서 자유를 제한하는 거지요. 정치와 경제는 밀접하게 결합돼 있지만 그것을 구분하셔야 합니다.
ps: 국내에서 진보, 리버럴들이 소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론을 만들어 낸 이사야 벌린을 비난하고 있다는 것은 아시나요? 이사야 벌린을 "공공의 적"으로 간주하더군요. 이사야 벌린이 적극적 자유라는 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라고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논리의 일관성이 없습니다.
2014.01.04 14:53:18
차칸노르/ 자꾸 남에 대한 비판을 하ㄹ 따에 그로, 고ㅏㄴ계없는 사람들을 끌어다가 싸잡아 비판하십니다.
전 국내의 얼치기 지ㄴ보주의자들이나 자칭 리버럴들에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위에선 설명이 미진했는데 왜 미국식 리버럴들이 경제여역에서 적극적 자유를 옹호하고 았다고 말하는가.
그들이 볼 때에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없으므로 진정한 경제적 자유르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죠. 또 겅제영역에서 발생하는 독점 등을 새ㅇ각해 보면 다ㄴ순히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소극적 자유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겁니다. 그래서 필요에 따라 정부가 구ㄱ민의 경제행위에 규제를 가한,ㄴ 거ㅅ이기도 하ㅂ니다.
이걸 님이 말한 대로 다수에 소수이 대한 포ㄱ력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하ㄴ편으로 보면 민주공화국에서으, 시민적 공공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조치이기도 합니다.
2014.01.04 15:40:47
차칸노르/ 이제 서로 입장이 더 부ㄴ명해진 것 가ㅌ습니다.
(윗 댓글과 합쳐서 답변드립니다)
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진보적 리버테리언의 입장이나, 제가 말한 적극적 자유 이론과는 그닥 차이가 없는 것 가ㅌ아요.
님이 마ㄹ씀하시는 수정자유시장경제와 제가 말하는 사민주의 시장경제도 마찬가지구요.
결국 한 가지 경향이나 저ㅇ책기조를 어느 관점에서 바라보는가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전 보다 공동체에 주ㅇ점을 두려는 것이고 님은 보다 개인에 주ㅇ점을 두려는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오타 죄송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2014.01.04 22:01:15
'리버럴리즘'을 '자유주의'로, '리버테리아니즘'을 '자유지상주의'로 옮기는 관행에 대한 문제제기가 별로 와닿지 않습니다. '자유지상주의'에 이미 '자유주의'보다 더 자유를 부르짖는다는 의미가 들어와 있는 것으로 된 것입니다. '리버럴리즘'을 '자유주의'라고 옮기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생각은 자유를 더 부르짖는 것이 자유를 더 온전하게 부르짓는 것이라는 판단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틀린 것일 수도 있고 맞는 것일 수도 있는 그 판단을 두 낱말을 한국어로 옮기는데 반영하는 것보다는 현재의 기계적으로 중립적인 역어들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일본쪽 웹사이트들을 검색해보니 우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완전 자유주의'라고 옮기는 용례가 있기는 합니다만, '리버럴리즘'은 '자유주의'로 옮깁니다.) 물론 그게 왜 기계적으로 중립적인 역어들이냐고 의아해 하는 것은 차칸노르님의 자유입니다.
롤즈를 '진보적 리버테리안'이라고 부르시는데, 역시 와닿지 않습니다. 롤즈는 통상 평등주의적 리버럴리스트로 분류됩니다. 구글 검색을 해도 롤즈를 진보적 리버테리안으로 기술하는 용례는 나오지 않습니다. '진보적'을 '좌파적'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롤즈는 마땅히 '진보적 리버테리안'이라 불려야 하니 남들이야 어떻든 나는 그렇게 부르겠다는 입장이신가요?
2014.01.04 11:29:48
차칸노르님/
제가 요새 시간이 없어서 님의 글과 그 밑의 댓글들에 대해서 일일이 다 커멘트를 달 수는 없음에 대해서 양해를 구합니다. 전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는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글이 상당히 생뚱맞다고 느끼는 데, 왜냐하면 지적하신 샌델의 원글은 "현대 경제학"의 문제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지, 우파적 또는 리버테리안적인 가치에 대해서 비판하는 글이 아닙니다.
"현대 경제학 = 리버테리안들이 하는 학문"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데, 이미 이러한 전제조건을 깔고서 상당히 엄한 말씀을 하고 계신 것 같아서 듣고 있는 제가 어안이 벙벙하네요. 차라리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대한 리버테리안적 비판이라고 제목을 고치시면 좀 이해가 갈만은 한데요.
제가 요새 시간이 없어서 님의 글과 그 밑의 댓글들에 대해서 일일이 다 커멘트를 달 수는 없음에 대해서 양해를 구합니다. 전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는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글이 상당히 생뚱맞다고 느끼는 데, 왜냐하면 지적하신 샌델의 원글은 "현대 경제학"의 문제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지, 우파적 또는 리버테리안적인 가치에 대해서 비판하는 글이 아닙니다.
"현대 경제학 = 리버테리안들이 하는 학문"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데, 이미 이러한 전제조건을 깔고서 상당히 엄한 말씀을 하고 계신 것 같아서 듣고 있는 제가 어안이 벙벙하네요. 차라리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대한 리버테리안적 비판이라고 제목을 고치시면 좀 이해가 갈만은 한데요.
2014.01.04 11:42:15
비행소년 / 샌델의 주장은 샌델의 주장대로 현대경제학을 비판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저는 그것을 읽고 제 입장(진보적 리버태리언)에서 생각을 말한 것입니다. 왜 생뚱맞게 제 이야기를 하느냐고요? 샌델이 글 속에서 보수적 리버태리언의 입장만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장, 기증고집 말고 시장에서 자유롭게 사고팔게 하자. 돈 줘서 마약중독자 피임시키자 등등 이런 거 리버태리언들만이 주장하는 생각들이잖아요.
게다가 샌델의 주장이 그대로 사회나 경제에 적용되면 그것 역시 모순이 많이 발생한다는 것, 샌델 사상의 기본이 집단주의적 공리주의인데 그것 자체도 문제가 많고 인센티바이즈의 부정은 사실상 자유시장의 부정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가 왜 생뚱맞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샌델이 글을 쓰면 독자는 마치 점수구걸하는 샌댈의 바보같은 하바드 수강생들처럼 샌델의 입장을 강화하는 혹은 재설명하는 글들만 올려야 합니까?
샌델의 책들을 보면 몇가지 사람들이 혹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문화사회적 사례를 제시하면서 유비추리식으로 전체 이론에 대입시켜서 자기 이론의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는데 저는 샌델의 방식이 매우 허술하다고 봅니다. 샌델의 모든 강의나 연구 방식이 그런 것 같던데... 그럴듯한 사례를을 들을 때는 혹하죠. 재미있으니까. 그러나 따지고보면 엉터리. 집단주의적 공리주의 자체가 이미 많은 하자를 가지고 있는 사상입니다.
게다가 샌델의 주장이 그대로 사회나 경제에 적용되면 그것 역시 모순이 많이 발생한다는 것, 샌델 사상의 기본이 집단주의적 공리주의인데 그것 자체도 문제가 많고 인센티바이즈의 부정은 사실상 자유시장의 부정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가 왜 생뚱맞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샌델이 글을 쓰면 독자는 마치 점수구걸하는 샌댈의 바보같은 하바드 수강생들처럼 샌델의 입장을 강화하는 혹은 재설명하는 글들만 올려야 합니까?
샌델의 책들을 보면 몇가지 사람들이 혹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문화사회적 사례를 제시하면서 유비추리식으로 전체 이론에 대입시켜서 자기 이론의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는데 저는 샌델의 방식이 매우 허술하다고 봅니다. 샌델의 모든 강의나 연구 방식이 그런 것 같던데... 그럴듯한 사례를을 들을 때는 혹하죠. 재미있으니까. 그러나 따지고보면 엉터리. 집단주의적 공리주의 자체가 이미 많은 하자를 가지고 있는 사상입니다.
2014.01.04 12:21:51
차칸노르/
그 정도 입장이면 됐습니다만, 글을 읽는 이가 오독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보여지네요. 애초에 제가 말한 것처럼 센댈의 정의론 자체를 지적하는 것이 나았을 뻔 했습니다.
일반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보건데, 차칸노르님이 언급하신 센델의 "내가 세상을 지배한다면"이란 글 자체에서 주장하는 말은 현대에서 인센티바이즈가 너무 오용되고 있다라는 정도로 들릴 뿐, 저에게는 그렇게 부정적으로 들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유시장의 부정이라고 까지 몰아부치는 차칸노르님이 생뚱맞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센델이 말한 다른 컨택스트를 이번 것과 연결해서 말하자면 차칸노르님의 주장이 일리가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저같은 사람은 정의론을 읽었지만 시간이 좀 되었더니, 센델의 이번글과 옛날 책의 어느 것과 어느 것을 연결해서 이해해야 하는지 매칭이 잘 안될 지경이에요. 제 기억력을 탓해야하겠지만, 발제 자체가 아래의 칼도님글에서 나왔으니 읽는 사람은 오독할 여지가 있음을 감안하여 글을 써주셨으면 더 좋았을 뻔 했다는 아쉬움이 큽니다.
그 정도 입장이면 됐습니다만, 글을 읽는 이가 오독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보여지네요. 애초에 제가 말한 것처럼 센댈의 정의론 자체를 지적하는 것이 나았을 뻔 했습니다.
일반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보건데, 차칸노르님이 언급하신 센델의 "내가 세상을 지배한다면"이란 글 자체에서 주장하는 말은 현대에서 인센티바이즈가 너무 오용되고 있다라는 정도로 들릴 뿐, 저에게는 그렇게 부정적으로 들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유시장의 부정이라고 까지 몰아부치는 차칸노르님이 생뚱맞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센델이 말한 다른 컨택스트를 이번 것과 연결해서 말하자면 차칸노르님의 주장이 일리가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저같은 사람은 정의론을 읽었지만 시간이 좀 되었더니, 센델의 이번글과 옛날 책의 어느 것과 어느 것을 연결해서 이해해야 하는지 매칭이 잘 안될 지경이에요. 제 기억력을 탓해야하겠지만, 발제 자체가 아래의 칼도님글에서 나왔으니 읽는 사람은 오독할 여지가 있음을 감안하여 글을 써주셨으면 더 좋았을 뻔 했다는 아쉬움이 큽니다.
2014.01.04 21:16:56
이런 특수한 상황의 경우 롤즈의 정의론이 모순이라고 말할 것 까지는 안되고 그냥 예외적인 경우로서 공리주의가 적용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모든 구성원의 요구조건들이 완전히 똑같으니까 이 특수한 경우에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를 적용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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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를 적용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그 무엇인가를 적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인간성이 사라지는 극한의 상황에서는 합리성도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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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리버태리어니즘 사상은 사민주의자들에게도 자본주의를 신뢰하는 보수주의자들이인간의 모습을 한 자본주의로 수정된 자본주의를 요구할 때 유용한 철학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최소수혜자집단의 장기적 기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경우 차등, 즉 자본주의의 자유가 허용된다는 롤스의 철학은 사민주의나 수정자본주의를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할 것으로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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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수혜자집단의 장기적 기대치의 극대화라는 관점은 평등의 가치를 무반성적으로 경시합니다. 최소수혜자의 평등한 후보들로서의 사람들은 가능한 여러 정치경제 체제 사회들 사이에서 가장 불평등하지만 최소수혜자가 받는 혜택이 절대적으로는 가장 큰 사회를 무조건 가장 선호하는 존재들로 상정할 수 없습니다.
롤즈의 정의론은 사민주의나 수정자본주의의 이념을 정당화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뿐 사민주의나 수정자본주의를 제대로 기능하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는 없습니다. 롤즈는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마르크스 등과 달리 철저히 분과학문으로서의 정치철학 안에 머물러 있는 까닭에 그에게서는 사민주의나 수정자본주의가 그 이념에 맞게 돌아가게 하는데 도움되는 아무런 실제적인 논의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정치경제학과 구체적인 대안체제론을 전공하는 많은 좌파들이 그런 사민주의나 수정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음을 주장합니다. 사실 정당화면에서의 도움도 별로 실질적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다른 체제들에서는 그 이념을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더 어려운가에 대한 아무런 실질적인 얘기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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