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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은 여기로 http://media.daum.net/politics/newsview?newsid=20131229104010590



. 머리 좋기로 빠지지 않을 안대희 전 대법관(검찰 출신)은 "나는 김기춘에 비하면 발바닥"이라며 그의 아이큐는 170대일 것이라 말한 바 있다.


1939년생인 김기춘은 2013년 8월5일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말을 유행시키며 일흔다섯의 나이에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1958년 서울법대에 입학한 김기춘은 3학년 때인 1960년 말에 제1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김기춘이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5·16장학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것은 1963년과 1964년, 그가 해군 해병대 법무관으로 근무하면서 어떤 재주를 부렸는지 모르지만 서울대 대학원을 다닐 때였다. 이것이 그가 박정희 일가와 처음 인연을 맺은 때다.

군복무를 마친 초임 검사 김기춘의 첫 발령지는 광주였다. 일설에는 그의 장인이 된 박찬일 변호사가 김기춘을 사위로 삼기 위해 김기춘의 첫 부임지가 광주가 되도록 로비를 했다고도 한다. 반면 김기춘 자신은 서울법대 동기동창의 동생으로 지금의 부인인 박화자 여사에게 반해 그와 결혼하려고 스스로 광주를 임지로 선택했다고 주장했다.(<경향신문> 1990년 1월5일치) 

김기춘은 대단한 애처가로 알려져 있다. 


김기춘은 1967년 부산지검 검사, 1969년 서울지검 검사를 거쳐 1971년 8월에 법무부 법무과 검사로 발령이 난다. 


서울법대 헌법학 교수로 있다가 유신헌법 제정에 상당한 역할을 했으며, 뒤에 유신정우회(유정회) 국회의원으로 정책위의장을 지낸 한태연은 2001년 12월 한국헌법학회가 연 '역사와 헌법 학술대회'에서 유신헌법 제정 과정과 김기춘의 역할에 대해 상세한 증언을 한 바 있다.("유신헌법은 박정희가 구상하고 신직수·김기춘이 안을 만들었다" <오마이뉴스> 2001년 12월9일치)


한태연은 "측근들 얘기를 들으면 평소부터 박 대통령은 드골 헌법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며 "김기춘 과장을 파리에 보내 1년 동안 드골 헌법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도록 했다"고 소개했다. 한태연은 "나와 갈봉근 (당시 중앙대) 교수가 (법무부에) 가보니 신직수 장관과 김기춘 과장이 주동이 돼 안을 모두 만든 상태였다"며 "장관이 '골격은 손댈 수 없다'고 해 '자구 수정' 정도만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기춘은 자신은 파리에 간 일이 없고 당시에 과장이 아니라 평검사였다며, 자신은 프랑스에서 '비상사태하에서 대통령 권한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 등에 대해 조사하여 보고하는 정도 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고 한태연의 발언을 부인했다. 

 1973년 봄의 검찰 인사에서 법무부 과장(부장검사급)으로 승진한 사람들이 주로 사법고시 8회(<경향신문> 1973년 4월2일치)였기 때문에 12회인 김기춘이 승진한 것은 참으로 유례없는 일이다.


평검사 김기춘은 과장(부장검사)으로 승진했지만, 법무부 장관 신직수는 1973년 말 중앙정보부장으로 영전했다. 이때 신직수는 김기춘을 중앙정보부로 불러들여 부장의 법률보좌관을 삼았다. 

문세광 사건 수사에서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한 김기춘은 그 공으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승진했다. 김기춘은 서른다섯살 나이에 중앙정보부에서 가장 막강한 부서의 책임자가 되어 유신체제 유지의 대들보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대공수사국장 시절 김기춘의 대표작이 1975년 11월22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학원침투 북괴간첩단' 적발사건이다. 이 사건의 주요 피해자들은 재일동포였고 사건 관련자들은 부산대·서울대·한신대에 유학중이거나 이들과 친하게 지낸 재학생들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1975년은 인혁당 관련자 사형 집행, 남베트남 정권 붕괴, 장준하 암살 등 참으로 살벌한 때였다. 


부산대로 유학 온 김오자라는 젊은 재일동포 여학생은 한국 사회를 엄습한 그 깊은 침묵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혼자 유인물을 쓰고 만들고 뿌렸다. 거기서 단서가 잡혔다. 그때만 해도 유인물에 한자를 쓸 때였는데 노동을 한자로 쓰면서 일본식으로 동에 사람인변을 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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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쓴 것이다. 중앙정보부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재일동포 유학생들이 무더기로 붙잡혀가 조사를 받았다. 당시 한국에 와 있던 재일동포 유학생은 200~300명에 불과했는데 이 사건 하나만으로 전체의 10%가량이 한꺼번에 간첩으로 몰렸다. 김오자 등은 수사과정에서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 김오자의 옆방에서 수사받은 재일동포 유학생 김동휘에 따르면 '인간의 비명 소리가 아닌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박정희 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한겨레21> 제885호, 2011년 11월14일치)

허화평한테 궁지 몰리자 박철언한테 매달려



6공의 황태자라 불렸던 검찰 후배 박철언은 5공화국 시절 김기춘이 궁지에 몰렸을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실이 있는데, 이를 자기 회고록(박철언,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1>)에 자세히 털어놓아 김기춘을 거북하게 만들었다. 



전두환이 유신헌법 대신 5공화국 헌법을 만들고 정식으로 5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문제가 불거졌다. 전두환 정권은 법원에서는 법관 재임명으로 37명을 탈락시켰고, 검찰에서는 "10년 이상 경력을 가진 검사 200명에게 검찰쇄신을 위해 인사권자가 소신 있게 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명분 아래 일괄 사표를 제출하도록 하여 이 중 26명의 사표를 수리"했다.(<매일경제> 1981년 4월25일치) 전두환의 보안사령관 시절 비서실장으로 세도가 당당했던 허화평(육사 17기)이 보안사와 악연이 있는 김기춘의 옷을 벗기려 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궁지에 몰린 김기춘은 청와대 비서관으로 있던 대학후배 박철언에게 매달렸고, 박철언은 김기춘에게 허화평에게 전달해줄 테니 편지를 써달라고 말했다. 김기춘은 얼마 후 "일종의 충성맹세"인 "구구절절 장문의 편지"를 써 왔고, 박철언은 이 편지를 허화평에게 전달하며 적극적인 구명에 나섰다. 그 덕에 김기춘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았고 검사장으로 승진하기까지 했다. 박철언 덕분에 검사장에 승진하기는 했으나 보직은 검사장급에서 한직으로 취급받는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장을 맡았다.

삼양라면 공업용 쇠기름 사건도 그의 작품

전화위복, 새옹지마란 말이 있다. 오뚝이 김기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유신 시절 동기들이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앞서가던 김기춘은 5공 때는 찬밥을 먹었다. 세월이 바뀌어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뒤 여소야대 상황에서 5공 청산이 시대적 과제가 되었을 때, 5공 시절 찬밥을 먹은 김기춘은 1988년 12월 검찰총장으로 화려하게 무대의 중앙에 복귀했다.


김기춘이 지휘하는 검찰은 1989년 '5공 비리' 수사를 진행하면서 전 안기부장 장세동 등 49명의 5공 인사를 구속했다. 한 가지 흥미있는 것은 처음에 김기춘의 옷을 벗기려다가 충성편지를 받고 김기춘을 살려준 허화평은 당시 그가 소장으로 있던 준국책연구기관 현대사회연구소 노동조합이 허화평의 구속을 요구하며 시위(<한겨레> 1988년 12월3일치)를 벌였는데도 구속을 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김기춘이 검찰총장으로 있던 시절은 바로 민주화 이후 수구세력의 반격이 시작되어 공안정국-보수대연합-범죄와의 전쟁이 이어진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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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임기제 검찰총장 김기춘은 1990년 12월5일 2년 임기를 마치고 총장에서 물러났지만, 곧 일선에 다시 

 5월초에 숨진 박승희의 장례가 광주에서 무려 20만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거행되고, 서울에서는 또다른 여학생 김귀정이 경찰의 강제해산 과정에서 숨지자, 노태우 정권은 다음날인 5월26일 김기춘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했다.



<뉴스타파>의 보도에 따르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조작한 검사들 대부분이 박근혜 후보의 대선캠프 주변에 몰려 있었다.

김기춘은 원로그룹인 7인회의 일원이었고,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장으로 사건의 수사책임자였던 강신욱은 검찰 몫의 대법관을 지낸 뒤 2007년 박근혜 캠프의 법률지원 특보단장을 지냈다. 수사검사였던 남기춘은 박근혜 캠프의 열린검증소위원장, 수사검사였던 윤석만은 박근혜 후보의 외곽조직인 대전희망포럼 공동대표였다. 또 수사검사였던 곽상도는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첫 민정수석이 되었다가 채동욱 검찰총장을 장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밀려난 바 있다. 김기춘은 이들 모두의 우두머리다.


'탁월한 법률가' 김기춘의 완벽한 탈출


각 언론이 정몽준 의원 쪽에서 녹음한 테이프를 풀어 상세히 보도하면서 "우리가 남이가" 등 거기서 김기춘이 한 발언은 한동안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날 김기춘은 "중립내각이 나왔기 때문에 마음대로 못해서 답답해 죽겠다"면서도 치밀한 성격과는 달리 막 달렸다. 그 자리에 모인 공직자들은 아직 장관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인데 김기춘은 그들에게 "안 해봐서 그런 거야. 장관이 얼마나 좋은지 아나, 모르지"라고 자랑하면서 "부산·경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 정주영이 어쩌니 하면 영도다리에서 칵 빠져 죽자"고 지역감정을 부추기기도 했다. 워낙 자기가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하면서 무리수를 많이 두었던 것을 염려한 탓인지 김기춘은 "잘못되면 혁명적 상황이 와서 전부 끌려들어가야 할 판인데 여당 해야지 그럼 어떡합니까"라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라는 노골적인 주문을 하면서 "훗날 보면 보람 있는 시민이라고 다들 느끼게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자신했다. 녹음테이프가 돌아가고 있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속마음이 고향에 가 한잔한 김에 거침없이 나온 것이다.

. 선거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된 김기춘은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인 1993년 3월 "선거운동원이 아닌 자의 선거운동을 규정한 구(舊) 대통령선거법 제36조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참정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어 위헌"이라며 법원에 위헌제청을 신청했다. 


. 결국 1994년 여름 헌법재판소는 이 조항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고, 김기춘에 대한 재판은 공소 취소로 없던 일로 끝났다. 법비(法匪)란 말이 있다. 온갖 비적이 들끓던 만주에서 가장 무서운 비적은 법으로 무장한 법비였다. 김기춘이야말로 법비 중의 법비였다.

법비 김기춘은 1996년 신한국당의 공천을 받아 고향 거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2000년과 2004년 선거에서 연거푸 당선되어 3선 의원이 되었다. 

국회의원 시절 그가 가장 플래시 세례를 받은 것은 2004년 3월12일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뒤 헌법재판소에 탄핵안을 접수시킨 때였다. 당시 김기춘은 국회 법사위원장으로 탄핵소추의 검사 격이었는데 법사위 여당 간사는 16대 국회에 제출된 친일진상규명법안에 대해 여야 합의가 이루어졌음에도 법사위에서 단기필마로 법안을 누더기로 만들어버린 합천 출신의 김용균이었다. 

박근혜 '쉰 386 세대'의 맨 앞줄에 서다

김기춘은 이렇게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아직 60대였던 2008년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고령자라는 이유로 공천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검찰총장직에서 물러나면서 김기춘은 후배 검사들에게 "학생시절의 순수성 정의감이 끝까지 퇴색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을 남겼다.(<동아일보> 1990년 12월5일치) 남다른 흑역사를 간직한 김기춘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학생시절의 순수성과 정의감은 안녕들 하십니까?

한홍구/성공회대 교수·교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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