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호남의 문제는 386의 문제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 386의 문제가 가장 노골적으로 표면화된 것이 바로 친노 또는 노빠라고 불리우는 정치세력과의 관계일 것이다. 386을 단순한 세대 개념이 아닌 특정 정치적 지향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할 때 간단히 말해 '리버럴'이라고 표현해도 큰 무리는 없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이 글에서 사용하는 '386'이란 용어는 상당한 진보/좌파적 지향성을 내포한, 한국 사회의 리버럴 그룹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80년대 내내 그리고 90년대에 이르기까지 호남과 386은 긴밀한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어왔다. 호남은 광주항쟁/학살의 충격을 핵심 정치 자산으로 하여 386에게 투쟁 동기와 예술적 영감과 정치적 명분 나아가 일정한 사회정치적 참조모델까지 제시했다. 여기에 더해 호남은 386의 가장 뛰어난 전투역량을 공급하는 기지이기도 했다. 전대협 한총련의 주축 가운데 하나였던 호남지역 학생운동 역량도 그렇지만, 사회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진보적인 성향을 띤 세력이나 집단에는 호남 출신이 참여해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70년대까지 호남에 덧씌워진 이미지 즉, 고춧가루, 양아치, 깡패, 뒷통수 잘 치는 인종들이라는 이미지에 덧붙여 좌빨, 빨갱이, 친북, 항상 불평불만인 족속 등의 이미지를 덧붙이는 효과를 낳았다. 사회의 '정상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암적 세력이라는 이미지가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호남의 이미지가 '보잘 것 없지만 추하고 불쾌한 존재'에서 점차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해치는 매우 위험한 세력'이라는 쪽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호남이 저항세력의 주축으로 떠오르면서 기득권 세력이 느끼는 불안감이 호남의 이미지에 그대로 반영된 셈이다.

386은 호남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물론 386도 호남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호남만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명분'을 제공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80년대 전두환은 '광주(사태, 학살, 항쟁)'라는 용어 자체를 없애려고 시도했다. 1980년 5월 하순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아예 역사에서 지워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증언이 남아있다). 실제로 이 시도는 적어도 몇십년간은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스페인의 프랑코나 칠레의 피노체트가 내전 과정의 어마어마한 학살을 덮어버린 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모범사례(?)의 하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광주'는 80년 당시부터 이미 정치적 이슈가 되기 시작했다. 서울대 학생이 학살에 항의해 자살했고 일부 개인적이고 분산적인 형태이지만 항의 시위가 조직되기도 했다. 81년부터는 83년까지는 대학가의 지하서클을 중심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조직 및 선전 선동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이미 항의 운동과 데모는 '광주'를 도저히 그냥 '없었던 일'로 덮어둘 수 없는 수준으로 확대 발전했다. 84년 전두환 정권이 대규모 자율화를 허용하고 85년에는 거의 캠퍼스를 해방구로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러한 저항운동의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학생운동 특히 386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1980~1984학번들은 치열한 전투 경험을 쌓아갔다. 이러한 경험은 향후 우리나라 진보 리버럴의 핵심 자산이 됐으며 보수세력은 학생운동 차원을 넘어 사회 각 분야에서 이들과 대립하며 좌빨 알레르기를 갖게 됐다.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영역에 걸쳐 진보와 보수, 좌와 우의 대립전선을 형성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386의 등장이라고 봐야 한다.

호남에게 있어서 이들의 존재와 활약은 '호남만의 깃발'에 그칠 수도 있었던 소외와 학살의 경험을 보편화시키고 고립을 피하게 해주는 엄청난 지원이었다. 하지만 호남-386의 연대는 두 가지 근본적인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영남'이었고, 또하나는 '근대화'의 숙제였다. 이 두 가지는 분리된 이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호남은 386에게 80년대의 투쟁을 상징하는 핵심 이슈였지만 근본적으로 386이 추구했던 것은 호남의 고립 탈피나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 소외의 극복이 아니었다. 386이 추구한 정치적 과제는 정치적 자유화, 법/제도적인 측면의 민주화, 인권의 개선, 경제적인 불평등의 해소, 사회 문화적인 불합리성의 해소 등 이른바 '근대화'의 과제로 수렴할 수 있다. 남북문제 등 민족적인 이슈는 여기에 포함될 수도 있지만, 엄격하게 말해 근대화 자체의 이슈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점에서 남북문제는 근대화의 주변 이슈 또는 후순위 과제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정치적 성향으로 보자면 근대화의 과제 자체를 내세운 쪽이 리버럴 좌파, 민족적 이슈를 내세운 쪽이 리버럴 우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의 절정기로 접어들면서 386과 리버럴 세력의 주도권은 이 민족적 이슈를 전면에 내세운 리버럴 우파가 장악한다. 직선제 개헌 요구와 반제반핵 이슈가 기묘하게 결합하는 형태가 만들어졌고, 장기간에 걸쳐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직선제 개헌 요구가 수용된 이후 전반적인 제도적 민주화 등 근대화의 이슈는 질적 과제가 아닌 양적 과제의 수준으로 이슈의 성격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질적 과제로 남는 민족적 이슈는 386의 원래 정치적 정체성인 근대화의 이슈에서 한 걸음 비껴난 곳에 있었다. 그런 점에서 민족적 이슈와 386의 결별 또는 관계 약화는 필연적인 결말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 386과 호남의 결별을 예고하는 신호이기도 했다.

이 문제는 간접적으로 영남의 존재와 결합한다. 영남은 민주화의 흐름에서 한 걸음 비껴나 있었지만, 해당 지역에 집중적으로 투입된 경제적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다. 또, 영남 출신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의 인프라를 장악하고, 그 인프라를 근대화/고도화시키는 작업을 주도하고 있었다. 민주화(근대화)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영남이 실제로는 그 근대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물적인 토대를 거의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직선제 개헌 이후 호남과 386의 결별, 영남과 386의 결합이라는 비극적인 시나리오가 잉태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김영삼의 삼당합당은 사실상 386이 영남의 물적 토대에 투항한 최초의 사건이다. 이 사건은 결코 일시적인 정치적 해프닝이나 변절이라고 폄하하기 어렵다. 비록 김영삼 본인은 그 의미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을지라도, 이 사건은 이후 대한민국 정치 지형에서 숱하게 반복될 사건들의 원형(prototype)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원형이란 이후 숱한 변형을 통해 역사적/현실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는 그런 숙명을 지닌다. 이재오 김문수 원희룡 오세훈 심재철 박계동 제정구 등 이름조차 다 기억하기 어려운 이른바 진보/개혁/좌파/민주화 세력이 한나라당으로 줄줄이 백기 들고 투항한 사건은 바로 삼당합당의 복제판에 불과하다. 그것의 의미는 386이 추구했던 근대화의 과제가 바로 영남이 장악한 물적 토대라는 '블랙홀'에 흡수되는 과정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사실 정상적으로 말하자면 역사의 발전 단계는 여기에서 한 매듭이 지어지는 게 맞다. 그 매듭이란 바로 영남 386의 승리이다. 영남 리버럴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한 핵심 투쟁에서는 주력이 아니었지만, 민주화라는 커다란 역사적 전환점을 통과(질적 변환)해, 지속적으로 근대화라는 숙제를 해결해가는(양적 변환) 프로세스를 무난히 밟아갔다면 영남 386은 역사의 주역으로, 진정한 승리자로 자리매김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이것은 호남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호남은 자신들의 소외와 고통을 해결하는 것을 원했지, 자신들이 영남의 패권을 빼앗아 그 자리를 대신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1992년 대선과 김대중의 정계은퇴이다. 호남의 한과 대다수 386(영남을 제외한)의 분노/좌절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의 대선 패배 및 은퇴는 해피엔딩이 될 수 있었다. 김영삼이 80년대 내내 제기됐던 민주화/근대화의 과제를 특별한 과오 없이 수행했다면 충분히 그런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김영삼이 집권 초기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등 두드러지는 개혁의 성과를 이루어냈을 때 호남 지역의 김영삼 지지율이 90%를 넘었던 것은 이를 반증한다. 설혹 김대중이 개인적인 야망으로 정계 복귀를 노리고 있었다 해도 그것이 현실화될 수 있는 통로가 막혔을 것으로 봐야 한다.

하지만 김영삼의 개혁은 실패했다. 집권 말기의 IMF는 그 총체적인 결과일뿐, 실패 자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김영삼의 개혁은 어디에서 실패했는가?

첫째, 개혁 과제에 대한 인식이 부정확했다.

김영삼이 개인적으로 생각해온 개혁이란 사실상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느껴온 불편을 해소하는 차원에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즉, 자신의 집권을 방해해온(것으로 판단한) 군부세력을 축출했고, 정치자금의 부정한 거래로 (자신이 모르는) 정치적 시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금융실명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김영삼은 군부세력이 퇴조하면서 사실상 기득권의 새로운 사령탑으로 등장한 조선일보 등 제도언론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이 없었다. 아니 그 자신이 바로 그 제도언론의 옹립으로 집권한 셈이니(언론계에 김영삼 장학생이란 말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김영삼이 제도언론의 장학생이었다고 봐야 한다) 이것은 불가피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중동이 김영삼의 개혁을 공격하고 나서자 승부는 너무 일찌감치 결정됐다. 김영삼은 순식간에 백기를 들었고, 386의 영남패권 투항은 가속화됐다. 김영삼은 여기에 부응해 노골적으로 영남패권을 공고화하기 시작했다. 사실 문민정부 시절 영남패권은 그 양적 확산도 확산이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정당화'되는 절차가 본격화되었다는 것을 더욱 큰 특징으로 지적해야 한다. 전두환 노태우 시절에는 그래도 영남패권을 관철하면서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했는데, 이제는 눈도 가리지 않고 노골적으로 으르렁대는 양상이 된 것이다. 박관용이 국회의장 되면서 의장실의 호남 출신 직원들을 모조리 쳐낸 것이나, 김영삼이 영남 위주의 정부 인사를 지적하는 질문에 대해 "능력 위주로 쓰다보니 그렇다"고 답변한 사례는 사실상 그러한 거대한 흐름의 극히 일부가 우연히 눈에 띈 사례일 뿐이다.

둘째, 호남의 문제를 외면했다.

김영삼은 집권 후기로 가면서 노골적으로 호남을 적대시하는 태도를 드러냈다. 호남 소외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민주화 투쟁에 대한 보상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이것은 영남 386 등 호남 문제를 "빨리 돈 줄 것 줘서 보내버려라"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세력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은 노무현과 유시민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이다. 민주화 과정에서 호남이 피 흘렸고, 우리(386 특히 영남 386)이 그 덕을 본 것은 사실인데, 이제 적당히 그 값 쳐서 줄테니 빨리 꺼지고, 높은 분들(영남)이 고상하고 중대한 국가적 과제를 놓고 토론하는 데는 끼어들지 말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김영삼과 노무현의 인식에 차이가 있다면 김영삼은 "100원짜리 동전 하나면 됐재?"라고 말하는 반면 노무현은 "헤임, 그게 아니고요, 천원짜리 하나는 줘야 할 거 아임껴?"라고 말하는 차이이다. 지켜보는 호남이나 다른 386들은 금액 차이도 차이지만 노무현이 김영삼에게 '항의'했다는 사실 자체에 노무현에게 감격한 꼴이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본질은 둘 다 "저 지저분한 것들 빨리 돈 줘서 보내라"는 것이다. 지금 유시민을 중심으로 한 국참은 좀 다르다. 이 친구들은 아예 100원짜리 동전도, 천원짜리 지폐도 없는 탓에 호남이 껴안고 있는 깡통이라도 뺏어야겠다는 접근법을 구사한다.

하지만 호남 문제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기회의 균등과 참여의 보장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호남 소외의 해결 차원으로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근대화의 핵심 과제이다. 즉, 지역이나 학력이나 성별 등에 의해 사회적 의사결정이나 자원의 배분에서 소외되지 않는 프로세스의 정착이라는 문제이다. 이것은 근대화의 핵심 이슈이고, 사실상 민주화 투쟁이나 직선제 개헌 요구도 바로 이러한 요구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호남 소외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요구가 얼마나 달성되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 시금석, 바로미터, 탄광의 카나리아, 잠수함의 토끼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호남이 여전히 소외되어 있다는 것은 바로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기회와 참여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호남이 문제가 아니고, 호남으로 상징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권리가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바로 호남이 문제라는 것이다.


왜 아직도 호남이 문제인가 (1)
왜 아직도 호남이 문제인가 (2)

* 4회에서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