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중순에 주일 대사관을 옮기면서 3.1운동과 관동 대지진 학살 사건의 한국인 피해자 명부, 일제시대 징용자 숫자가 적힌 서류가 발견된 사실이 보도되어 화제가 되었다. 이 서류는 우리 정부(이승만 정권)가 일본에 보상 청구를 하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3 사건에서 발생한 우리 민족의 피해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이다. 그런데 이 서류가 공개되자, 언론과 역사학계는 일본의 잔학상만을 강조했지, 희생자 숫자에 대해서는 스치듯 넘어가는 형태를 보였고, 우리 국민들 중에서도 이것(희생자 숫자)에 주목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던 듯하다.

이번에 발견된 이승만 정부의 3.1운동과 관동 대지진 학살 사건에 대한 공식 기록(희생자 수)과 현재 역사 교과서에 기술된 내용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3.1운동의 경우, 대부분의 교과서는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나오는 3.1운동 희생자 상황을 올린 표를 인용하여 7,503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이번에 발견된 자료에는 630명으로 나와 있다. 이는 총독부가 당시에 집계한 553명과 유사한 숫자로 박은식이 집계한 숫자의 1/10도 되지 않는다.

관동대지진 학살 사건에서 조선인이 희생된 숫자도 우리 역사서는 2천~6천명으로 추정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문서에는 290명으로 나와 있어 이 역시 우리 역사 교과서가 10배  이상 부풀렸다는 느낌이다. 일본 내무성이 조사한 사망 231명, 부상 43명의 숫자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우리가 과장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서류는 우리 정부(이승만 정권)가 일본을 상대로 보상금을 청구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임으로 우리 스스로 희생자 수를 축소해 조사하거나 작성했을 리도 없으며, 당시 이승만이 일본에 대해 가졌던 감정을 고려할 때도 희생자 수를 축소했을 개연성은 적어 보인다. 따라서 이번에 발견된 문서에 나타난 3.1운동과 관동대지진 학살 희생자의 숫자는 사실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이번에 발견된 서류(기록)를 대하는 우리 역사학계의 태도가 마음에 걸린다.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면 그것을 검증하고 역사(교과서)를 바로 잡으려는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데 그럴 기미도 보이지 않고 누구 하나 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이 없다. 이건 양심의 문제다. 일본 극우들이나 후쇼샤 교과서가 역사를 왜곡한다고 그렇게 비난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어도 과거에 잘못 기술된 역사(서)를 바로 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이율배반이고 비양심적인 것이다.


우리 역사학계가 역사적 사실에 객관성과 형평성을 결여하는 경우는 우리 내부의 아름답지 못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침묵하거나 드러내지 않으려는 데서도 나타난다.

내가 우리 역사교과서를 전부 보지 않아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근현대사에 <자유시참변> 이나 <만보산 사건>을 다룬 경우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자유시참변>은 일명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불리는데 1921년 6월 28일, 노령 자유시(알렉셰프스크)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셰프카에 주둔 중인 한인 부대인 사할린 의용대를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와 한인보병자유대대(이하 자유대대)가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 수백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으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파쟁이 불러일으킨 한국 무장독립전사상 최대의 비극적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항일독립무장운동은 사실상 궤멸되어 버린다. 하지만 우리 역사교과서는 우리의 무장독립운동사에서 애써 이 사건을 외면해 서술하지 않고 있다.

<만보산 사건>을 우리 역사교과서에서 기술하지 않는 것은 더 더욱 이율배반이며, 비양심적인 것으로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판하고 시정을 촉구하려면 반드시 우리도 역사교과서에 이 사건을 기술해야 한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은 희생자 숫자를 부풀려 일본의 잔학성을 비난하면서 정작 우리가 죄 없는 중국인(화교)을 살상하고 몰아낸 수치스러운 과거는 우리 국민들이 알지 못하게 숨기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것이다.

<만보산 사건>은 1931년 7월 2일중국 만주 지린 성(吉林省) 창춘 현(長春縣) 싼싱바오(三姓堡) 만보산 지역에서 조선족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수로(水路) 문제로 일어난 충돌 및 유혈사태를 일컫지만, 이 충돌사건을 조선일보 김이삼 기자가 중국인이 조선인을 살상했다고 국내에 오보를 전하면서 조선 내에서 민족감정을 촉발되어 조선인들이 수 백명의 중국인들을 살상한 사건을 함께 포함하여 말한다. 김이삼의 기사로 인천을 필두로 경성·원산·평양·부산·대전·천안 각지에서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났으며, 평양과 부산과 천안에서는 대낮에 중국인 상점과 가옥을 파괴하고 구타·학살하는 사건이 며칠간 계속되는 등 잔인한 폭력사태로 확산되었다. 폭동으로 인해 127명(평양과 부산과 천안에서만 94명)의 중국인 사망자가 있었으며, 부상자가 400명이었고 손해는 250만 원에 이르렀다. 이 사건 이후 국내의 화교 수는 6만에서 3만으로 반감된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적으로 화교가 힘을 쓰지 못하는 거의 유일한 국가가 된 것도 이 사건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화교 뿐 아니라 유태인도 발을 들이지 못한 것이나, 현재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우리 국민들의 태도를 보면 이민족에 대한 포용이나 이해의 수준이 여전하며, 그들에 대해 적대시하는 것이 과거 일제시대의 일본이 조선인에 행했던 것에 비해 낫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 경제는 어쩔 수 없이 외국인 노동자 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글로벌화가 시대의 흐름임을 감안할 때 다문화 국가로의 전환은 필연적일 것으로 보이는데, <만보산 사건> 같은 이민족을 배척하고 학살했던 부끄러운 과거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반성하는 태도 없이 원만한 다문화 국가로의 이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참고 자료>

1) 주일 대사관, 3.1운동과 관동대지진 희생자 명부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2683463

2) 한국근현대사전의 3.1운동 희생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94929&cid=1593&categoryId=1593

3) 한국근현대사전의 관동대지진 사건 희생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9860&cid=829&categoryId=829

4) 만보산 사건(한국근현대사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9870&cid=829&categoryId=829

5) 만보산 사건(위키)

http://ko.wikipedia.org/wiki/%EB%A7%8C%EB%B3%B4%EC%82%B0_%EC%82%AC%EA%B1%B4

6) 자유시참변(한국근현대사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9921&cid=829&categoryId=829